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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허만하
이제는 돌아와 신라 瓦當(와당)의 미소를 닮은 시인
정일근
솔직하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許萬夏(허만하) 선생님을 소개하는 <커버스토리> 원고 매수가, 원고 마감일에 인용글까지 포함해 200자 원고지로 200장이 넘어가고 있었다. 중편소설에 가까운 이 글은 지면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 때까지도 나는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서둘러 끝을 내도 300장은 충분히 넘어가는 분량이었다. 내 작업을 지켜보던 지인들은 웃으며 선생님의 傳記(전기)를 쓰느냐고 물었다. 난감했다. 원고마감일을 넘기며, 나는 선생님에 대한 글들을 요약하는 일에 몸과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생님의 문학은 요약해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생님은 한 자도 빠트릴 수 없는 시적 성과와 한 줄도 지울 수 없는 문학적 이력을 가진 분이다. 그래서 나는 고민 끝에 선생님의 문학사 중에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삽화 몇 장만 소개하기로 한다. 대해 같은 선생님 문학을 어찌 물고기 몇 개 비늘 이야기로 소개할 수 있으랴만, 이 글이 허만하 선생님의 시를 찾아가는 길에 서 있는 작은, 아주 작은 이정표이길 바랄 뿐이다.
허만하 선생님의 문학적 이력은 간결체로밖에 쓸 수 없다. 1957년 《문학예술》지 3회 추천과정을 거쳐 시인으로 데뷔. 시집 《海藻》(해조)(1969, 삼애사)와 일어시집 《銅店驛》(동점역)(1980, 일본 시요사), 그리고 두 권의 산문집 《부드러운 시론》(1992, 열음사) 《모딜리아니의 눈》(1997, 도서출판 빛남). 그것이 전부다. 더 요약하자면 선생님은 43년의 詩歷(시력)에 현재로는 단 한 권의 개인시집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다. 선생님의 첫 시집 《해조》에는 32편의 시가 세로로 인쇄돼 있다. 면수는 90여쪽, 가격은 300원. 운 좋게도 나는 선생님의 첫 시집을 소장하고 있다. 귀한 시집을 선생님이 얼마 전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 시집이 출판되었을 때 나는 경남 진해의 초등학생이었다. 시내버스 차비가 2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 시집의 진짜 주인은 작고하신 소설가 崔泰應(최태응) 선생님이다. 시집 속에 최 선생님의 이름과 허만하 선생님의 서명이 남아 있다. 선생님은 1969년 6월 시집을 펴내고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99 (22통4반)’에 살고 있는 최 선생께 ‘제4종’ ‘등기’로 보냈는데 시집이 되돌아온 것이다. 그 시집은 30년 동안 선생님의 서재에 숨어 있다 나와 인연이 된 것이다. 그것도 누런 봉투와 함께. 시집을 담은 봉투에는 20원짜리 우표도 그대로 붙어 있고, 30년 전 선생님이 주소를 쓴 잉크 글씨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부산시 영도구 영선동 3가 73 허만하.’ 그 때 선생님은 부산의 섬인 영도에 사셨나 보다. 영도다리에서 바라보는 바다빛과 같은 잉크가 아직도 선명하다. 다시 30년이란 세월이 흘러간다 해도 선생님이 잉크로 쓴 글씨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선생님의 첫 시집을 읽는 즐거움은 37살의 선생님을 찍은 흑백사진에도 있다. 단정하게 가르마를 탄 머리, 군인처럼 짧게 친 귀밑머리, 양복, 와이셔츠, 넥타이, 카메라 앵글은 아래서 위로 선생님의 얼굴과 팔짱을 낀 자세를 담아 당당한 모습이다. 부리부리한 눈빛. 자신의 시에 아주 자신이 있는 자세다. 시집을 다 읽고 그 흑백사진을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감히, 나는 선생님의 첫 시집을 평가한다. 나는 《현대시》 올 2월호 <이달의 시 현장점검>에서 선생님의 시 <마른 멸치를 위한 에스키스>를 분석하며 선생님은 《병리학자와 시인의 눈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세상을 보는 시인》이라 소개했다. 선생님의 첫 시집에도 그 두 개의 눈이 고스란히 들어 있어 좋다. 두 편의 시를 소개한다. 1950년, 1960년대, 1970년대産(산) 시인들이여. 경외심을 가지고 이 시들을 읽자. 이 시들은 그대들이 어렸거나, 태어나지도 않았던 1960년대에 쓰여진 시가 아닌가.
짙푸른 北極(북극)의 밤바다쪽으로/아우성치며 밀치닥거리며 떠나려가는/이 數(수)많은 二十世紀(이십세기)의 호모·사피엔스./累億(누억)의 갈매기떼같은 群集(군집)속에서/濃霧(농무)같이 切實(절실)히 다가오는 寂寥(적요)에/고개드리운 한마리 말없는 짐승./洪績世(홍적세)의 氷塊(빙괴)끝에 어쩌다 살아남은/아, 나는 외로운 네안데르탈人(인)./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죽음의 山頂(산정)에서/고개를 西(서)로 돌려 울며 있었다./盲目(맹목)의 두 눈으로 울며 있었다./그 巨大(거대)한 火球(화구)가 내뿜는 白熱(백열)의 안개속/다시 그것을 바라볼 生命(생명)이 滅(멸)한 마지막 저녁/最初(최초)의 人間(인간)이 바라본 驚異(경이)의 해돋이처럼/茫然(망연)히, 노을에 젖은 두뺨은 젖어있었다./한때는 저무는 舊大陸(구대륙)을 방황하던 네안데르탈人(인),/石英(석영)의 破片(파편)으로 노루를 쫓던/맨 주먹으로 맘모스와 싸우던 짐승같던 人種(인종),/누우런 犬齒(견치)를 드러내어 킬킬 웃어쌓으며/靑石(청석)위에서 헐레도 붙어쌓던/神(신)을 모르고도 바로 네가 神(신)이었던/아, 이마가 좁은 네안데르탈人(인)./걸레같은 倫理(윤리)를 아득히 넘어선/第四氷河期(제4빙하기) 形而上(형이상)의 山頂(산정)을 기어올라/내 안죽겠다고 絶叫(절규)하던/五十萬年(오십만년) 그 前(전)의 네안데르탈人(인)./나라를 잃고, 젊음을 잃고/奈落(나락)의 깊이로 떠나려가는/아, 植民(식민)의 싱그런 氷塊(빙괴)에 걸터앉아/덜렁거리는 認識票(인식표)를 목에 걸고/목쉰 소리로 외치고 있는/그 무리들 속에서 나는 외로운/아, 나는 한마리 네안데르탈人(인) ─ <네안데르탈人(인)> 전문
성난 잇발같이 다가선/壯年期(장년기) 山(산)의 銀(은)빛 살갗-/그 강파른 벼랑 발치를 깨물며/悠然(유연)히 흐르는 검은 山峽(산협)의 물/그 기슭에 추락할 듯 간신히 붙어진/한없이 조용한 시골驛(역)./몇갑의 質(질)나쁜 담배와 대포를 파는/屬國(속국)같이 엎드린 두서너채의 판자집,/연방 기침을 하는/어린애를 입은 아낙네의 지친 얼굴./총총히 出札口(출찰구)를 들락거려쌓는/고향을 등진 파리한 男女老少(남녀노소)./아, 너는 無垢(무구)하게 쫓겨가던 아이누族(족)같은/江原道(강원도) 炭田地帶(탄전지대)의 첫째驛(역).
먼 道境(도경)의 山(산)들이/첫눈의 豫感(예감)에 떨고 있는 어느날 午後(오후)-/나는 앓는 쪽 딸애의 손목을 잡고/싸락눈같이 뿌리는 햇살을 헤치며/표표히 나들이를 떠날 것이다./어쩌면 人情(인정)같이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馬糞紙(마분지) 차표라도 만지면서,/또는 墓地(묘지)를 찾아 密林(밀림)을 橫斷(횡단)하는/코끼리의 覺悟(각오)에 찬 鈍重(둔중)한 걸음같이./그럼, 내가 떠난 뒤에도/누구의 記憶(기억)에도 없는 生活(생활)의 奧地(오지)에서/너 성냥갑만 銅店驛(동점역)은/被壓迫民族(피압박민족)처럼 가느다란 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마치, 온 人類(인류)가 滅(멸)한 먼훗날에도/몇 개의 虛無(허무)한 追憶(추억)을 싣고/廣漠(광막)한 虛空(허공)을 치닫고 있을 地球(지구)처럼/그렇게 信號機(신호기)는 目的(목적)없는 손을 흔들고 있을 것이다. ─ <銅店驛(동점역)> 전문
앞의 시는 병리학자의 눈으로 쓴 시고, 뒤의 시는 시인의 눈으로 쓴 시다. 뒤의 시 銅店驛(동점역)은 1980년 일본의 시요사에서 선생님의 오랜 일본문학인 친구인 《아리카와 요오치》 씨의 번역으로 발간된 선생님의 일어시집의 제목이 된다. 1960년대의 문체가 그대로 살아 있는 시집에서는 그 시대의 슬픔이 함께 느껴진다. 식민지 시대와 전쟁을 겪은 세대의 지식인들이 뿜어내는 주술 같은, 만트라 같은 소리가 들린다.
허만하 선생님은 오랫동안 부산을 지켜온 시인이시지만 1932년 대구출생이다. 선생님은 출생지를 대구의 《명치정 5정목》까지만 기억하고 있다. 지금의 중구 계산동. 인터뷰를 위해 햇살과 바람이 좋은 동해바다에서 만난 선생님은 번지를 알지 못해 미안한 표정이다. 나는 그 표정에서 선생님이 곧 자신의 출생지 번지를 찾아 나설 것을 읽을 수 있다. 선생님은 완벽주의자다. 언젠가 울산의 등대에 대한 아주 짧은 산문을 쓰면서 나에게 전화를 걸어 그 등대의 역사와 광도 등에 대해 세세히 물었다. 그냥 등대라고 적어도 될 것을. 선생님은 그런 적당함을 자신의 문학적 문장에서 용납하지 않는다. 대구 명치정 3정목에는 이상화 시인의 생가가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인연이었을까. 선생님은 올해 제14회 상화시인상을 수상했다. 대구 남산초등학교을 졸업하고 6년제의 대구중학을 다녔던 선생님은 미술부장을 지냈으며, 서울대학 유전학과에 진학을 해서 유전학을 공부하고 싶은 학생이었다. 그러나 대구중 6학년(현재 고3)이었던 1950년에 일어난 6·25가 선생님의 꿈을 짓밟아 버렸다. 전쟁으로 선생님은 군번 없는 학도병이 되어 영국군 통역으로 1년간 전쟁터에서 떠돌게 된다. 그 시절을 선생님은 이렇게 적었다.
짙은 안개처럼 초연냄새가 땅바닥에 깔리고 포성이 은은하게 울리는 전쟁터의 참호에서 고개를 밖으로 내어민 그가 바라보았던 것은 샛노란 민들레꽃이었다. 나의 시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나에게 그렇게 선연하게 다가왔다. 사실 그란 고등학교 학생(구제 중학교 이과 6년생) 신분으로 군번도 없이 최전선을 헤매었던 젊은 날의 내가 아니라 레비트로스의 젊은 날의 모습이다. 동란 전 반도를 휩쓸던 막스주의사상의 바람이 가라앉고 실존주의 사상이 젊은이들 사이에 번지던 시절이었다. 전후의 삭막한 풍토에서 내 시의 꽃은 나의 내부에서 하나의 필연처럼 피기 시작했던 것 같다. ─ <참호 밖의 꽃과 가슴 안의 꽃>에서 《시와 반시》 98년 겨울호
선생님은 전쟁으로 꿈을 잃고 시를 얻었다. 학도병에서 돌아온 선생님은 경북대 의과대학에 입학을 하면서 전쟁에서 얻은 시를 발표한다. 그 때 선생님은 미군 작업복을 짙은 밤색으로 염색한 옷을 즐겨 입고, 1954년 여름 대구의 신생문화사에서 발간된 김종길 시인의 《이십세기 영시선》를 읽으며 시의 새로운 방법론을 찾고 있었다. 학생 신분으로 영국군 통역으로 참전했던 선생님의 영어실력은 아주 우수했다. 1955년 7월 대구에서 발행된 잡지 《예술집단》(발행인 최해운)에 스티븐 스펜더의 평론 <시의 기능>도 번역 소개하고, 그의 <현대시의 弔鐘(조종)>도 번역해 발표한다. 그 무렵 선생님은 고전음악실 녹향에서 영미시의 원전을 읽고, 더러 시와 평론을 번역하여 발표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선생님은 그 시절 영미시에 대한 탐닉은 ‘전통이란 미명아래 정체해 있던 복고주의적 방법론을 벗어나 보려는 몸부림 같은 것’이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당시 선생님이 시를 발표한 지면은 학생기자를 지냈던 <경북대학신문> 과 대구지역 일간지 <대구매일신문>. 그런데 그 시절 꼭 언급해야할 문학잡지가 있다. 1956년 2월 대구에서 창간된 부정기 간행물 《시와 비평》. 선생님은 이 책의 편집동인으로 참여한다. 지금은 정치인이 된, ‘허주’라는 아호로 유명한 김윤환, 영화평론가인 이영일과 함께 문학 무크지를 펴낸 것이다. 그것도 서울이 아닌 대구라는 지역에서. 선생님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시와 비평 1호에서는 오래된 책내음이 나서 좋다. 뜨거웠던 세월이 삭은 향기 같은 것일까. 변색된 종이 위에 이상로, 신동집, 김요섭, 고원, 이활, 김종길, 김윤환, 허만하, 이영일의 시가 아직도 뜨거운 열기와 함께 스며 있다. 의과대학생이었던 선생님은 시뿐만 아니라, W.H 오오든의 장시 <헤럿왕>와 스티븐 스펜더의 시 <겨울 풍경> 등을 번역하고 영국의 여류시인 캐들린 레인의 <상징과 장미>도 번역해 놓고 있다. 시와 비평은 2호를 끝으로 폐간되었지만 전쟁 후 젊은 지식인들이 새로운 문학적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1950년대 문학사에서 반드시 연구되어야할 작업일 것이다.
의과대학생으로 시를 쓰던 시절 선생님은 우리나라 등단제도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선생님은 ‘시를 제작하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월간 《문학예술》 추천기에 덧붙인 이한직 시인의 글이 선생님을 문학적 제도에 편입하게 만들었다. 1956년 12월 의과대학 3학년이었던 선생님은 대구 중앙로 한 서점에서 그 달의 문학예술지를 읽다 이한직 시인의 글에 흥분하고 만다. 이한직 시인은 낭성만 시인의 작품을 추천하고 그 뒤에 이렇게 적었다. ‘대구에 허만하라는 젊은 시인이 있다고 들었다. 신작이 있으면 몇 편 보내와 주기 바란다.’ 겨울 아침, 서점에 서서 읽는 신간 문예지에서 자신을 시인이라 불러주는 선배시인의 호명에 선생님은 침묵할 수 없었다. 그 때의 일을 선생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의과대학 3학년생으로 일년 후면 국가고시를 치루어야 했던 나는 당황했다. 그러나 그날의 아침햇살은 상쾌했으며 발걸음은 가벼웠다. 1956년 12월호(제3권 12호)에 쓴 이한직 시인의 글이었다. 이 호의 안 표지 그림에는 Rien Rien이란 그가 즐겨 쓰던 단어와 함께 이한직씨의 옆얼굴이 실려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선생님은 이한직 시인의 이 초대에 손들고 나가 문학예술 1957년 2월호에 <果實(과실)>이란 첫 추천작품을 발표한다. 의과대학 졸업을 두 달 앞둔 때였다.
눈썹까지 부풀어 오른 地平(지평)과 맞닿아 목이 긴 몇 포기 가을풀들랑 두고는 눈이 자라는 한 높아 가는 짙푸른 바다. 이 바다를 風琴(풍금)소리처럼 어디서, 문득 이 하늘을 흔들며 일어오던 바람마저 갈앉으면, 이젠 너, 유독 노을보다도 짙은 果實(과실)밖에 없다. 切迫(절박)한 스스로의 餘裕(여유)로 가지를 휘이며 늘어져 오는 하마 瞬間前(순간전)의 靜物(정물), 허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연이어 있는 숨결인가. 지난 봄은 꽃, 꽃은 진달래, 잎은 여름내, 淋 (임리)히 피흘리며 있는 이 純白(순백)한 果肉(과육)으로부터, 자욱히 서리어오는 白(백)나비떼들 밖엔 歲月(세월)의 발자국에 剝離(박리)한 皮膚(피부)에서처럼, 지나온 수없는 해돋이 日沒(일몰) 또 달빛 같은 것. ─ <果實(과실)> 전문
그 이후 그의 길은 의사의 길과 시인의 길을 함께 걸어가야 했던 바쁜 길이었지만 졸업식장에서는 91명의 의과대학 졸업생을 대표하는 수석졸업생이었다. 그리고 그는 같은 해 문학예술 4월호에 2회 추천작 <날개>를 발표한다.
함박눈이 나리는 層階(층계)가 있다.//그 어디서 본듯하면서 영영 모양 지을 수 없는 視線(시선)이 저리어//살며시 層階(층계)를 오르내리며/가슴속에 고이는 意味(의미)를 밟는다.//발자욱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어느 집 時計(시계)가 석점을 치고/당신은 분명 울고 있었다.//커다란 한낱의 날개가 되느라고//내가 남긴 累億(누억)의 발자국들이/함박눈처럼 쏟아지는 소리였다. ─ <날개> 전문
추천이 완료되는 3회 추천의 시간은 좀 오래 걸렸다. 2회 추천을 받은 지 8개월 뒤인 그해 12월호 <꽃>이란 작품이 발표됐다. 그 작품은 마산의 육군군의학교에서 군의관 후보생으로 3개월의 교육을 받는 동안 쓰여졌고, 당선소감은 모교인 경북대 병리학 교실에서 육군의 기초 의학요원으로 일하고 있을 때 썼다.
이 썩은 胸壁(흉벽)에서 꽃을 피어나게 해주십시오./바람에 엎드려 우는/暗澹(암담)한 밤을/여윈 肋骨(늑골)을 깨무는 自棄(자기)의 물결을/시원히 微笑(미소)짓는 눈물의 꽃을./사랑하던 모든 것은 말없이 가고/疏遠(소원)히 이젠 혼자 남았습니다./끝없는 砂丘(사구)의 炎熱(염열)을 오히려 짙푸른 肉葉(육엽)으로/抵抗(저항)하며 서 있는 仙人掌(선인장) 같은/그 숨막히는 忍耐(인내)와도 같은 빛깔의 꽃을./저 無邊(무변)한 空間(공간) 어느 透明(투명)한 境域(경역)에서 퍼덕이고 있을/찢어진 깃발 같은 決意(결의)의 꽃을./悔恨(회한)처럼 구비치는 긴 時間(시간)을/자욱히 落葉(낙엽) 지던 수 없는 背信(배신)을/또, 모래를 씹으며 견디었던 기다림 같은 꽃을./꽃처럼 희고 차운 것이 휘몰아치던/그 北國(북국)의 氷原(빙원)에서 바라보던 노을처럼/찬연히 樣姿(양자)할 내 푸시케의 噴水(분수),/言語(언어)가 이미 다한/그 애절한 抱擁(포옹)만한 龜裂(균열)을 두고/지친 눈빛으로 서로를 읽던/限(한)없이 暗澹(암담)하던 밤 같은 꽃을. ─ <꽃> 전문
선생님은 이한직 시인의 호명에 손들고 나가 1957년 1년을 등단이란 과정과 싸웠다. 선생님은 <꽃>을 투고하고 소설 <페스트>의 작가 알베르 카뮈가 그 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혼자서 축하의 막걸리를 마셨다. 소설 페스트에 나오는 의사 ‘리유’의 자세에서 방황하던 많은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의 당선소감을 이렇게 썼다.
해방이 되자 고물장수들이 수지를 맞추었다. 본국으로 돌아가느라, 일본 사람들이 많은 물건들을 쏟아 놓았기 때문이다. 나도 그 바람에 현미경을 한 대 살 수 있었다. 요즘 손때가 베도록 사용하고 있는 쌍안짜리 ‘바우슈앤드 로옴’ 같은 멋진 것이 아니라, 일제의 초라한 것이었지만 나의 기쁨은 여간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닥치는 대로 슬라이드 위에 얹어 들여다 봤다. 잎의 단면, 파뿌리, 개의 정액 등등. 한겨울 방천가에 나가서 동결한 녹조 같은 것을 건져올 때 내 손은 얼기도 했다. 그 온달같이 둥근 시야에 여태 생물학책 그림에서만 본 ‘파라메시움’ 같은 단세포생물이 그 숫한 융모를 흔들며 유유히 유영하며 있는 것을 바라본 때의 스릴은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삼삼히 남아있다. 그후 한없는 기적과 회의 속에서 사변을 치루고 또 사랑의 연옥을 겪고 하는 틈에 나는 어느덧 또 하나의 현미경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눈에 뵈지 않는 ‘시’라는 것이었다. 그 시야는 한결 넓고 깊은 것이었다. 그리고 질적이며, 개성적인 것이었다. 강, 구름, 슬픔, 조국(국호가 아니다) 같은 것들이 옛날과 다른 새로운 광채를 띠고 선명히 다가오는 것이었다. 나는 서슴없이 임리히 전개되어 오는 그 지평의 세례를 받았다. 거기서 나는 들리지 않는 소리랑, 뵈지 않는 빛이랑, 죽음보다도 암담한 보람같은 것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정연한 자연의 법칙에 못지않게 삶의 체험은 실한 것이다. 나는 헤매는 유태인처럼 이 인식과 감성의 두 세계를 소요하면서 밀봉처럼 많은 것을 축적하고 싶다. 그래서 한날한날의 죽어가는 것에 나대로의 의미와 숨결을 불어넣어 주고 싶다. 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 sunt. 다만 은처럼 성실히, 앞으로 더 많은 코피를 흘려야 할 것을 안다. ─ 문학예술 당선소감 <현미경>
추천과정을 밟으며 발표한 3편의 시와 당선소감을 읽으면 선생님의 1950년대가 보인다. 전쟁이 끝난 황폐한 조국을 바라보는 젊은 지식인의 초상도 함께 보인다.
의사로서의 선생님을 잠시 이야기를 할 차례다. 선생님 1957년에 의사가 되었고 또한 시인이 되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선택한 의사의 길은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가 아니라 질병을 연구하는 병리학자의 길이었다. 유전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고 싶었던 선생님은 병의 원인을 규명하는 의사가 된 것이었다. 선생님은 평생을 진료실이 아닌 병리학교실에서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병균과 싸웠다. 1964년 해부병리전문의 및 임상병리전문의가 됐고, 1966년 병리학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4년 미국 코네티커트대 의대 병리학 초빙교수를, 1989년 대한병리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1997년 부산 고신의대 교수로 정년퇴임을 하고 현재도 고신대 외래교수를 맡고 있다. 정년퇴임을 할 때까지 선생님은 시인의 눈보다 병리학자의 눈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선생님은 시인으로 한 권의 시집을 가졌지만 병리학자로서 무려 132편의 논문을 썼다. 학회에 발표한 논문 초록만도 94편이나 된다. 선생님이 평생을 싸운 병은 위암. 선생님은 살아 있는 위점막 조직을 처음 조사한 병리학자로 유명하다. 선생님은 1990년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선생님은 수술로 생명은 구했지만 손과 발의 일부가 불편하게 되셨다. 그러나 선생님은 불편한 몸으로도 병리학교실을 지켜 7년 뒤인 1997년 명예로운 정년퇴임식을 가졌다. 김종길 선생님 표현대로 ‘의사며 환자로, 환자며 의사’로 병리학자의 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병리학교실을 떠난 뒤 비로소 그 열정을 시에다 쏟기 시작하셨다. 정년퇴임식을 가진 1997년 이후 선생님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치는 시인 중의 한 분이다.
선생님은 1962년에 발족한 <현대시>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1960년대 한국시단의 주요 詩人群(시인군)으로 활동하게 된다. 우리 시단의 1960년대를 이끌었던 현대시 동인은 1971년 26집을 내고 해체한다. 그리고 1978년 해체 7년만에 동인활동을 했거나 마지막까지 동인으로 남았던 허만하, 주문돈, 이유경, 이승훈, 오세영, 박의상, 이수익, 이건청, 마종하, 김영태, 김규태, 시인 등 11명이 모여 《현대시 11인선》(심상사)를 펴낸다. ‘현대시 동인의 재개가 아닌, 해체 7년동안 써온 작품들의 확인과 집대성’이란 주장을 내걸고 묶어진 이 책에 선생님은 <손> 등 30편의 시를 발표했다. 선생님 개인적으로는 첫 시집 이후 10년간의 세계가 다시 한 번 정리된 셈이다. 해체 이후에도 그렇게 멋진 문학적 만남을 가질 수 있었던 현대시 동인들은 1994년 다시 모였으며 1995년부터는 동인회 이름으로 신인상을 만들어 등단 5년 미만의 새로운 시인에게 수상하고 있다. 시력 40년을 넘긴 선생님들이 새내기 시인에게 주는 상. 이 얼마나 아름다운 상인가. 선생님은 현대시 동인으로 이 상의 심사에 참여하시면서 젊은 시인들에게 많은 애정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변화였다. 선생님을 젊게 만드는 변화였다. 그 변화는 다소 굳어 있던 선생님의 문학관을 부드럽게도 만들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젊은 시인들의 시를 읽고 그들의 세계를 호흡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과 차 한 잔을 놓고 오랫동안 이야기하시는 것도 즐기신다. 나는 이러한 선생님의 마음을 사랑으로 읽는다. 선생님은 사랑을 베풀고 게신 것이다. 당신께서 시인의 눈으로 40년 이상 보아온 詩(시)의 진실과 비밀을 들려주고 계신 것이다. 선생님은 누군가가 자신이 들려주는 시의 진실과 비밀에 귀를 열고 자신이 걸어온 길을 계속 걸어가 주길 원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후학들에게는 힘든 일일 것이다. 선생님이 무심히 서 계신 그 자리를 찾는 일만도 우리에게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 부산문인협회에서 만드는 계간 잡지인 《문학도시》 여름호에 쓰신 글 뒤에 밝힌 약력에 ‘1976년 공저 신라의 기와’란 한 줄이 눈에 들어와, 신라의 기와란 책을 읽어볼 수 없겠느냐고 부탁을 드렸다. 나는 선생님 산문의 애독자다. 선생님께서 1997년 여름에 펴내신 산문선 《모딜리아니의 눈》(도서출판 빛남)은 늘 가까이 두고 읽고 또 읽는 책이다. 지난해 겨울 금강산에 오를 때도, 영월 동강 백 이십 리를 걸어서 답사할 때도 여행가방 속에 챙겨간 책이다. ‘시와 그림에 대한 산책’이란 작은 제목을 가지고 있는 그 책에는 모딜리아니의 눈이 아닌 선생님의 눈이 숨어 있다. 그것은 선생님께서 언젠가 시로 밝힌 적이 있는 ‘본다는 행위에 값하는 사랑의 대상이 있기에 생겨난’ 시인의 눈이다. 그 책을 읽고 있노라면 선생님은 가르쳐 준다. 무릇 시인이라면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얼마나 정밀하고 아름다운 눈을 가져야 하는가를. 《신라의 기와》란 책은 선생님께서도 한 권만 가지고 있어 빌려준다는 조건으로 며 칠 뒤 우편으로 보내져왔다. 하드 커버의 두툼한 책이었다. 한국건축사대계란 시리즈의 5번째(Ⅴ)인 책은 신라시대 기와에 대한 전문연구서였다. 선생님은 그 책에 신라기와에 대한 8편의 글을 쓰셨다. 필진들 중 가장 많은 편수의 글이었다. 책의 제작에 참여한 분들은 신영훈, 김동현, 정재현, 김주태, 강우방, 문명대씨 등. 문화재 전문가들과 함께 만드는 책에서 선생님은 ‘부산 시인’이란 이름으로 신라 기와에 대한 따듯한 사랑에서 오는 해박한 지식을 풀어 놓으셨다. 역시 선생님이셨다. 책의 서두를 장식한 ‘절터의 美學(미학)’에서부터 미학적 문체에 숨이 턱턱 막힌다.
마른 풀잎사귀들 틈에 쓰러져 있는 礎石(초석)을 본다. 어디서 종달새 소리도 들린다. 구름 가운데서 떨어지는 저 지저귐도 오랜만이다. 흩어져 있는 기와조각들 틈에 오랑캐꽃이 보인다. 연약한 꽃이다. 멀리서 밭갈이하는 사람이 보인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한결 같은 모습이다. 흰나비가 보인다. 두 마리가 한창 장난을 치고 있다. 나는 절터에 서서 永遠(영원)한 것을 생각해 본다. 문뜩 눈물겨워 진다. 가을의 절터는 더 적료하다. 천년의 바람이 목이 긴 억새풀을 흔든다. 바지가랑이에 방앗개비 한 마리가 매달려 있다. 가엾은 목슴. 햇볕이 아직 따갑다. 민가의 지붕 위에 빨간 고추가 조용히 타오르고 있다. 古典(고전)에 대한 사랑은 폐허에서 시작된다. 집어 올린 기와조각은 아무 것도 아니다. 무늬도 없다. 뒤집어보면 삼베자국이 보인다. 가만히 손바닥 위에 얹으면 표정이 있는 한 생명이다. 피가 도는 것을 느낀다. 던져버리면 또 한 덩어리의 無機物(무기물)이다. 사람도 기와와 마찬가지다. 죽음으로써 生(생)을 완성한다. 죽음으로써 처음으로 말문을 연다. 나는 다만 겸허하게 그 침묵의 言語(언어)에 귀를 기울일 따름이다. ─ <절터의 美學(미학)> 에서
읽어 보라. 소리내어 읽어 보라. 빈 절터에서 발견되는 작은 기와 하나에도 선생님의 시선은 현미경 위의 세포를 보듯 정밀하고 사유의 색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선생님의 신라기와에 대한 8편의 글을 다 읽고는 나는 어떤 생각 하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책을 펼쳐 신라 영묘사터에서 발견된 ‘사람얼굴 무늬 수막새’를 찾았다. 영묘사터 수막새에는 ‘신라인의 미소’라 불리는 사람의 웃는 얼굴이 새겨져 있다. 나는 이번 호 표지에 싣기 위해 울산의 사진작가 권 일 선생이 찍어 인화해준 선생님의 얼굴사진과 신라기와의 얼굴과 비교해 보았다. 놀랍게도! 두 얼굴은 너무 닮았다. 눈가와 입가로 흐르는 미소의 윤곽은 물론 웃음이 만드는 부드러움의 미도 일치한다. 나는 당장 선생님께 전화를 드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지금 선생님의 두 번 째 시집이 서울의 솔 출판사에서 준비중인데, 시집이 출판되면 선생님을 경주로 모시고 가 그 수막새에 새겨진 미소를 앞에 두고 내가 발견한 사실을 확인 받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예, 저 신라 사람 미소가 선생님 웃는 모습과 꼭 닮았지예 그렇지예.”라고 물으며.
청마 유치환 시인의 시와 삶을 찾아 나선 1970년대, 부산시인협회 회장과 부산문인협회 회장으로 부산문단을 이끌던 1980년대, 초인적인 투병기를 보낸 1990년대. 아직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는 산처럼 남았다. 시와 산문 속에 수묵화처럼 번져 있는, 작고한 여류화가 C씨와의 사랑 같은, 텍스트들을 읽다 선생님께 여쭤보고 싶은 질문도 강처럼 남았다. 나는 선생님의 1950년대와 1960년대를, 그것도 아주 조금 이야기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선생님은 21세기에도 현역시인으로 시를 쓰실 것이다. 오랫동안 건강하게 우리를 가르칠 것이다. 오늘 다하지 못한 산과 강 같은 이야기들을 다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나는 믿는 것이다.
*인용한 시와 산문은 출판된 당시의 원문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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