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강현국

적선하세요, 그리고 목마른 시대의 춤을 위하여

송종규

얇아진 가을 햇살이 켜켜로 빈 찻잔 속에 내려와 앉는다. 빈 찻잔 속이 가득 찬다. 모처럼 비가 그치고 세상은 잘 닦여진 그릇처럼 반짝인다. <내 일생의 키워드 사이를 옷 뜯으며 가슴 치는 돌개바람 몰아쳐?>, 강현국 시인이 최근에 발표한 이 황당하고 긴 제목의 시를 펼쳐놓고 나는 햇살로 가득 찬 찻잔 속에 뜨거운 커피를 따른다. 조용히 햇살과 허공과 커피가 섞인다. 찻잔 속은 다시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내 일생의 키워드 사이를 옷 뜯으며 가슴 치는 돌개바람 몰아쳐?>?

패티 김을 좋아하고 바바리가 잘 어울리는 사람, 구석과 노래방과 술과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 그러므로 얼핏, 시밖에 있을 때 오히려 더 시인다워 보이는 사람. 그의 삶을 관통하고 총괄하는 키워드는 무엇일까. 그의 삶의 안쪽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를 찾기 위해서, 나는 대구교대 앞 지하 생맥주 집 <주유소>와 노래방과 카키색 헐렁한 바바리와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을 지나 세 권의 시집을 읽었다. 고향과 구석과 낭패함과 공복으로 꽉 찬 젖은 이미지들이 나를 끌고 다녔다. 나는 지금 조금 우울하고 조금 춥고 조금 행복하다.

한쪽 발을 황량한 고향 들판에 묶어놓고, 어둠이며 변방이며 결핍인 북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그의 모든 언어의 집합, 강현국 문학의 출발이자 궁극은 공복이다. 고향과 모든 구석들은 공복에게로 편입되고, 공복은 거대한 욕망이고 허무이며 분노로 확대된다.

昭和 8년에서 12년까지 「修身」난의 성적은 乙에서 丙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나’에서 ‘다’로 옮겨지다가 5학년 말에 퇴교를 당한다. 학교장 高田茂義에게 팔매질한 것이 이유라지만 돌팔매가 겨눈 것은 그가 아니라 왜말을 국어로 가르친 그가 아니라 할아버지이리라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가 죽자 계모를 맞아들인 어린 날 숙부의 아버지의 수염이거나 콧잔등에 걸린 돋보기이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나의 추측은 흔해 빠진 우국지사도 못 되고 결혼도 하지 못한 숙부의 삶에서 확인되는 터이다.

좀이 쓸고 새앙쥐가 갉아먹은 돌아가신 할아버지 사서삼경 책갈피에 昭和 8년에서 12년까지 가지런히 꽂힌 성적표를 보면서 호박에 말뚝박던 어린 날을 보면서 환갑이 불원한 내 숙부의 하고한 날 술주정에 애착을 느낀다

─ <昭和 8년에서 지난 해 여름까지> 부분

작품 앞부분에서 시인은 ‘지난여름 햇볕이 고운 날 사서삼경을 멍석 위에 말리다가’ 책갈피에 꽂힌 ‘숙부의 보통학교 적 성적표를 보았’다 라고 말한다. ‘흔해 빠진 우국지사도 못되고 결혼도 하지 못한’ 잘난 게 없는 숙부, 새앙쥐가 책을 갉아먹는 가난한 고향은 비애의 그늘을 안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고향을 이야기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객관적이고 담담하다. 모든 그늘은 목소리 뒤쪽에 가로수처럼 묵묵히 늘어서 있다.

‘......호박에 말뚝 박던 어린 날을 보면서 환갑이 불원한 내 숙부의 하고한 날 술 주정에 애착을 느’끼는, 공복과 허무가 마침내 연민을 넘어, 분노로 전이되고 있는 것을 본다. 이처럼 시적인 테마로서의 고향은 시인에게 있어서 사치스러운 추억이나 회상의 방이 아니라, 아주 고요한 애상의 곡조 위에서 역사성과 사회성을 획득해 내고 있다. 역사성과 사회성을 획득한 고향은 마침내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 모두의 고향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러한 시인의 인식은 아래 <고향3> 에서와 같은 시적 성취를 얻어낸다.

감나무 위에 걸린 확성기가

개똥이네 어머니를 불러내었다.

개똥이네 어머니는 김을 메다가

충치처럼 뽑히며 주막으로 뛰었다.

허겁지겁 주막으로 뛰어가다가

발을 헛디뎌 3.8선에 걸리고

발을 헛디뎌 지뢰가 튀고

개똥이는 느닷없이 하늘로 솟구쳤다.

하늘에 박힌 별이 유난히 밝아서

개똥이네 어머니는 뜬 눈으로 지새우고

이튿날 개똥이는 휴가를 왔다.

가슴에 번쩍이는 훈장을 달고,

…(중략)…

다음엔 누구를 불러낼 것인지,

호명되기 직전의 마음 여린 아이처럼

콩만한 가슴으로 살아가는 어머니,

외아들 키워서 3.8선에 빼앗기고

제대한 아들은 서울에 빼앗기고......

확성기의 힘 센 목소리가 이름을 부르면 속수무책 <충치처럼 뽑>혀, 그 곳이 비록 죽음이 기다리는 전쟁터일지라도 달려가야 하는 힘없는 사람들의 암담한 이야기다. 그러나 <충치처럼 뽑히며 주막으로 뛰었다> <발을 헛디뎌 3.8선에 걸리고> 어머니가 밟은 지뢰가 터지자 아들인 <개똥이>가 <하늘로 솟구쳤>다 등과 같은 발랄하고 빛나는 구절들이 자칫, 늘어지고 감상적이기 쉬운 주제를 가볍게 들어올려 슬픔조차 반짝이게 만든다. 휴가 나온 아들의 가슴에 달려있는 <번쩍이는 훈장>은 시인이 들어올린 슬픔이 가장 아름답게 반짝이는 절정의 순간이다. 쓸쓸한 이미지들이 환하게 들어올려지며 경쾌한 리듬 속으로 미끌어져 들어갈 때 슬픔은 이렇게 아름답게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 이쯤에서 <우리 일생의 키워드 사이를 옷 뜯으며 가슴 치는 돌개바람 몰아쳐?>를 다시 불러 내 보자. 시인은 아마 <간발의 차> 때문에 경북 상주군 구병산 자락에서 대구시 대명동으로 옮겨왔을 것이고, 그 <간발의 차> 때문에 시인이 됐을 것이고, <아 다르고 어 다른 간발의 차> 때문에 때로, <무릎을 탁 치거나> 평화롭던 <장독대가 박살나>기도 하고 <옷 뜯으며 가슴치는> <돌개바람>의 생을 살았을 것이다. <간발의 차> 때문에 천둥치고 <간발의 차> 때문에 <코소보 난민처럼 한 사람의 생애가 커다랗게 엎질러>지는, 운명적인, 이 삶의 부질없음을 그는 특유의 가벼운 터치로 <우리 일생의 키워드 사이를 옷 뜯으며 가슴 치는 돌개바람 몰아쳐?>라는 키치스러운 제목으로 가볍게 들어올렸으리라. 그렇다면, 제목에서 느꼈던 그 황당함은 이제 해소된 셈이다. 무거운 주제를 무겁지 않게 말할 수 있는 것, 그러면서 할 말은 다 하는 것, 그것은 시인의 전략이자 역량이다. 속절없는 세월의 대책 없음을 <큰일났다. 봄이 왔다>라고 딴청 피우는 작품 「후렴」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겠다.

이상한 일이야 사전에 안나오는 간발 때문에

몸과 마음 사이 끼어 있는 질문과 대답 사이 끼어 있는 발뒤꿈치 때문에

우리 일생의 키워드 사이를 어느덧 끼어 든 간발의 차 때문에?

…(중략)…

그러나 가령, 한 통화의 전화 때문에

발끝까지 환해질 때**

─ <우리 일생의 키워드 사이를 옷 뜯으며 가슴 치는 돌개바람 몰아쳐?> 부분

큰일났다. 봄이 났다

비슬산 가는 길이 꿈틀거린다

꿈틀꿈틀 기어가는 논둑 밑에서

큰일났다. 봄이 왔다 지렁이 굼벵이가 꿈틀거린다

침묵할 수 없고 정지할 수 없는 어떤 기막힘이 있어

色쓰는 풀꽃 좀 봐 伐木丁丁

봄이 왔다. 큰일났다

가난한 내 사랑도 꿈틀거린다

─ <후렴> 전문

범상치 않은 이미지들이 잘 짜여진 그물 속의 물고기들처럼 행간 사이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후렴>을 읽으면서, 나는 1982년 <문장사>에서 나온 그의 첫 시집 《봄은 가고 또 봄은 가고》에서 오규원이 쓴 해설 첫 부분을 생각했다. “姜玄菊이 달라져 있다! <달라져 있다!>고 할 때의 이 문장 끝에 나오는 감탄 부호 하나 속에 내가 느끼고 있는 한 시인의 변모와 의미를 생각하며 창 밖을 본다......”

<부모님께 바칩니다>라는 작은 글씨가 가지런히 채송화처럼 앉아 있는, 탈랜트처럼 보이는 첫 시집 속 장발의 청년에서 중년의 신사로 바뀐 것 말고, 대학 강사나 산업체 부설 고등학교 선생에서 대학 교수님이 된 것 말고, 그는 뭔가, 다시, 달라지고 있을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를 지배하고 있는 역사의식이나 현실인식, 그리고 어떤 신화적인 무의식의 힘이, 봇물처럼 고요하거나 공룡처럼 거대한 이미지들을 데리고 불쑥 세상에 나타났을 때 누군가, 또 “강현국이 달라져 있다!”고 소리쳐 줄 것을 믿는다. 시인에게서 늘 새로운 것을 기대할 수 없는 날이 온다면 세상은 얼마나 캄캄할 것인가.

詩歷 이십 년이 넘는 중견이면서도 중견에 걸 맞는(?) 거창한 포즈를 취하지 않고 시 앞에서 언제나 키를 낮추는 시인, 아무 데나 시를 흘리고 다니지 않는 시인, 안락한 방에 안주하지 않는 시인, 구석과 결핍의 시인, 그러므로 늘 공복인 시인, 그러므로 그의 시는 늙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이제 찻잔은 싸늘하게 식어 있다. 뜨겁던 열기와 이미지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허공만 남아서 가득하다. 아니 허공은 없고 이미지들만 가득하다. 뜨거운 커피를 다시 가득 따르고 나서 나도! 창 밖을 본다.

잡지일 때문에 시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휴대전화라 감이 별로 좋지 않다. 펑크 난 원고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나는 잘 풀리지 않는 내 산문에 대해서 일체 말하지 않는다. 고향 어머니를 뵈러 가는 그의 목소리가 조금은 들떠 있고 조금은 젖어 있다고 느낀다. 어쨌든 뚝뚝, 그의 목소리가 토막 난다. 그러나 목소리가 끊기는 것은 휴대전화 때문이 아닐 것이다. 죽은 누이와 작은 무덤, 종손인 강 노인, 감나무 위의 확성기, 도망간 오촌 아저씨, 눈깔사탕 만한 총알을 물고 있는 어린 날의 시인, 甲子乙丑 우는 개구리들이 전화선을 타고 쳐들어온 것은 아닐까. 아마 그럴 것이다. 나는 이 작은 단어들을 하루종일 데리고 놀 작정을 한다. 이 정겹고 쓸쓸하고 오밀조밀한 말들이 거느린 축축한 이미지들이야말로 시인의 한쪽 발을 거기, 경북 상주군 화남면 임곡리 구병산 아래 꽁꽁 묶어놓는, 폭력이며 연민일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모든 구석과 쓸쓸함의 총체이며 구석은 다시, 부끄러움을 낳는다.

내 방은 북쪽 구석에 있다

습한 구석에서, 나는

애벌레 한 마리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있다

애벌레 한 마리가 습한 구석을 질질 끌고

기어 나오는 것을 힘들어하고 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여름 한낮을 알리는, 아니

앞마당의 광활을 선포하는 수탉의 큰 날개를 부러워하고 있다

댑싸리 잎이 몸을 움츠리고

쇠비름 잔 그늘이 아연 잠적하는

수탉의 한세상을 신기해하고 있다, 나는

힘센 수탉의 의기양양이

먹이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먹이의 유혹과 먹이의 경계로부터, 먹이의 色쓰기로부터

내 방은 북쪽 구석에 있다, 나는 어느 날

애벌레 한 마리가 습한 구석을 질질 끌고

기어 나오는 것을 힘들어하고 있다

─ <여름 한낮엔 구석이 없다> 전문

가려움과 공복의 자손 고장 난 프로펠러의 세계라 가려움이 그리움을 낳고 그리움은 세월을 낳고 세월은 전쟁과 그의 형제를 낳고 전쟁은 어머니에게서 놋그릇과 눈물을 낳고 눈물은 달밤을 낳고 달밤은 외로움을 낳고 외로움은 지푸라기를 낳고 지푸라기는 성황당을 낳고 성황당은 요행을 낳고 요행은 추억에게서 보리고개를 낳고 보리고개는 노란 하늘에게서 찔레꽃을 낳고 찔레꽃은 그들의 왕인 공복을 낳으니라

공복은 사람의 아내에게서 기계를 낳고 기계는 동전 속에 세종대왕을 낳고 세종대왕은 문자를 낳고 문자는 역사를 낳고 역사는 밤을 낳고 밤은 사생아를 낳고 사생아는 지하도를 낳고 지하도는 적선하세요를 낳고 적선하세요는 섬짓함을 낳고 섬짓함은 소문도 없이 소문도 없는 벽을 낳고 벽은 자물쇠를 낳고 자물쇠는 불임증을 낳고 비단이불 속으로 기거할 때에 불임증은 이렇게 멀쩡함과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비단이불 속으로 이거한 후에 이렇게 멀쩡함은 부끄러움을 낳고 부끄러움은 변명을 낳고 변명은 기교를 낳고 기교는 180도를 낳고 180도는 지평선을 낳고 지평선은 새벽을 낳고 새벽은 파란 근육을 낳고 파란 근육은 알맹이를 낳고 알맹이는 구멍을 낳고 구멍은 다시 막힘을 낳고 막힘은 갈증을 낳고 갈증은 사막의 남편 섬을 낳았으니 사막에게서 엘리, 엘리라 칭하는 고장난 프로펠러가 나시니라

그런즉 아버지, 아버지,

곳간 가득 채워 주소서!

─ <마태복음 序說> 전문

강현국 시에서 구석은 커다란 관념이며 상징이다. 물리적이고 수학적이고 공간적인 개념의 구석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거대한 상징인, 본질적인 개념의 구석이 마침내, 공간적인 개념의 구석을 압도하고 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시 <여름 한낮엔 구석이 없다> 어디서도 구석은 관념이며 상징이다. 구석은, 먹이와 힘과 햇볕의 반대편에 있는 모든 것들을 총괄하는 개념이며 구석은, 수탉과 의기양양과 앞마당과 광활의 대칭에 서 있는 모든 것들의 총체이다. 거대한 관념과 상징이 적절하게 직조되고 형상화되었을 때, 시가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내 방은 북쪽 구석에 있>고 <애벌레 한 마리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있다>는 가상 공간의 설정이, 그가 차용한 작은 말들의 의미와 결합해서 구석은 거대하게 부풀어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습한 구석을 질질 끌고 나오>는 애벌레야말로 그의 무의식 속에 또아리 틀고 있는 리비도로 읽힌다. 먹이로부터 나오는 <수탉의 의기양양>을 신기해 하는 시인은 모든 풍요와, 힘과, 햇볕과, 그것들의 경계로부터 멀리 있다. 그러므로 시인의 방은 당연히 북쪽 구석에 있어야 한다.

<마태복음 序說>은 신약 성서 중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출생을 기록한 마태복음 1장을 페러디한 작품이다.

수많은 낱말들이 마치 끝말을 이어가 듯 꼬리를 물고 있다. 그러나 그 수많은 낱말들이 한결같이 딱, 적절한 자리에 압핀처럼 꽂혀 있다. 1연은 <가려움과 공복의 자손 고장난 프로펠러의 세계라>로 출발하여 <고장난 프로펠러가 나시니라>로 끝이 난다. 프로펠러의 자손이라니! 공복과 가려움이 쓸쓸함의 발바닥에 바람개비 돌리는 고장난 프로펠러를 낳는다. 당돌하다 느낄 정도로 차분하고 엄청난 비약이 성공함으로써 그의 시는 넓은 공간을 확보하고 있고, 행간 뒤에 더 큰 세계 하나를 풍경처럼 세워놓는다. 인물사진 뒤의 금강산처럼, 히말라야처럼.

외로움, 기계, 세종대왕, 동전, 적선하세요에서 자물쇠와 불임증까지, 부끄러움과 변명과 지평선에서 새벽과 구멍과 갈증과 사막의 삶을 거쳐 고장난 프로펠러까지 그의 공복은 모든 것을 관통하고 모든 것을 총괄한다. 물 흐르듯 흐르는 빛나는 이미지들은 결국 세계에 대한 성찰로 읽히고, 가난하고 부끄럽고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예리한 풍자로 읽힌다. 그의 시는 사회성과 역사성을 가졌으므로 더 크다라고 말했던 내 말을 <마태복음 序說>은 다시 입증해 주고 있다.

이쯤에서 잠깐 분위기를 바꾸어 보자. 나는 이 글의 서두에서 그를 일컬어, <시 밖에서 더 시인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었다. 그 말의 안쪽을 뒤집어 보면 그는 천성적인 시인이다라는 말이 될 수도 있겠다. 나는 왜,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 생맥주 때문이거나, <보고 싶은 얼굴>이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같은 패티 김의 노래 때문인지 모른다. 노래에 푹 빠져서, 노래에 섬세한 감정을 실어 가는, 그의 은밀한 마음의 결을 잠깐만 엿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질긴 끈이 있어, 시인의 발을 땅과 허공 사이에 떠 있게 한다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강현국 시인. 그는 이 시대를 사는 몇 안 되는 로맨티스트이고, 때로 은둔자이며, 부조리한 사회를 향해 불끈 주먹을 쥘 수 있는 반항아이다. 아니, 카키색 바바리 코트 자락에 깊숙이 묻혀 있는 우수를 빼놓고 그를 말할 수 없다. 그 우수의 근원은, 보기 싫은 사람은 절대 못 보는 성격 때문일 수도 있고, 좀처럼 똑바로 걸어가지 못하는 거지같은 세상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보기 드문 로맨티스트, 그리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지 못하는 그의 성격은 내가, 그를 감히, 선천적인 시인이라 말할 수 있게 만드는 이유이다.

두어 번, 나는, 습작 시절을 말하면서 강현국 시인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는 내게 시를 가르쳤으므로, 내게는 당연히 선생님이다. 그리고 오기를 불어넣었으므로, 다시 선생님이 된다. 그와 알고 지낸 습작기 잠깐, 그리고 데뷔 후 10 년쯤, 짧지 않은 날들이지만 나는 그에 대해서 전부를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아는 전부를 말할 수는 있다. 그는, 시밖에 있을 때도 한결같이! 시인이었다.

첫 시집 서문에서 사진 속, 장발의 그는 수줍게 말한다.

......부끄럽다는 것밖에/달리 할 말이 없다./ 잘 가거라, 지난 시간의 피 눈물이여./ 목마른 우리들의 춤을 위하여/ 한번 더 꿈꾸고 한 번 더 노래하리라.......

아마, 그 부끄러움이 그를 <엉거주춤> 사이에 있게 하고 <구석과 구석> 사이에 있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 진행해 왔던 TV 생방송에서나 시를 강의하는 그에게서 부끄러움이나 어두운 그늘 따위는 전혀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항상 세련되고 논리정연했고 당당했다. 그러나 내면 깊숙한 심연에 결핍과 부끄러움이 만나 만들어 놓은, 두드리면 텅텅 깡통처럼 울릴 것 같은 웅덩이 하나, 붉고 깊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곧, 모든 구석과 변방과 쓸쓸함의 집합인 공복이라는 커다란 늪일 것이다.

울컥, 계곡이 흔들리고/ 나는, 다슬기처럼 구겨지고 싶었다/ 구겨진 다슬기는 얼마나 편안할까......// 향기로운 들풀처럼/ 이승에서 잠시 우리가 만난 눈부신/ 계곡의 아침/ 한 컵의 바람에도 내 삶은 텅,텅,/ 깡통처럼 울렸다

─ <알 수 없는 일> 부분

3번 버스를 타고, 나는/ 담벼락에 부러진/ 우리들의 그림자를 받아들인다./ 만인 앞에 평등한 六法全書/ 단돈 천원의/ 특별선전기간을 받아들인다./ 나는 지금 공복이므로/ 동인동 뒷골목을 받아들이고/ 누이의 외로운 혼례를 받아들인다./ 이래도 될까, 버스가 잠시/ 시민회관 앞에서 멈추는 동안/ 봉산탈춤이 한창이었다./ 헛기침 앞세우고 양반이 가고 있고/ 재떨이의 꽁초들이 빈정거린다./ 한참을 가다보면/ 사무실의 심심한 의자들이 월요일을 기다리고/ 나는 재빨리/ 한 주일의 잔소리를 받아들인다./ 시가지를 벗어나자/ 버스는 논밭을 토해 버리나/ 토해버린 논밭마저 받아들인다./ 나는 지금 공복이므로/ 엄동설한을 받아들이고/ 큰 산과 작은 산을 받아들인다./ 3번 버스의 종점에 와서/ 낡은 엔진처럼 걸걸거리며/ 두류산 공원을 받아들이고/ 나는 비로소/ 까막 까치를 받아들인다./ 메리 크리스마스 메어리 크리스마스/ 나는 다시 공복이므로

─ <나는 지금 공복이므로> 전문

<나는 지금 공복이므로>에서 그는, 결핍의 삶을 말하되 배고파 죽겠다고 엄살 부리지도 않고 청승 떨지도 않고, 해학과 풍자와 역설로 재치 있게 풀어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읽는 즐거움과 함께 <지금 공복>인 시인이 오히려 넉넉하고 풍요롭게 보이기도 한다. 텅 비어 있으므로, 붉고 깊은 웅덩이인 시인의 내면은 모든 잡다한 일상 전부를 받아들이면서 화해하는 듯하지만, <이래도 될까>라며 언뜻 속마음 한 조각을 내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빈정거리는 <재떨이의 꽁초>와 한 몸인 시인은 <걸걸거리며>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나서도 다시, 공복일 수밖에 없다. 그는, <다슬기처럼 구겨지고 싶>고 <구겨진 다슬기는 얼마나 편안할까>라고 말하는, 스스로 칩거할 줄 알고 절제할 줄 아는 시인이자 결핍과 한 몸인 시인이다. 어쨌든 내가 읽은 그의 모든 시편들 속에는 잡다한 일상의 소품들과 사소한 가족사적 이야기들이 조밀하게 모여 있고, 시인은 그 잡다한 것들에게, 최상의 소리와 최대의 의미와 향기의 옷을 입혀 세상에 내놓았다.

나는 이미 강현국 시인의 시들을 <공복>이라는 커다란 웅덩이 속에 집어넣어 버렸고 이미지로 들끓는 수면 위는 고요하다. 그러나 문득, 수면을 박차고 甲子乙丑 우는 개구리가 튀어나올 것 같기도 하고, 죽은 누이가 무덤을 박차고 나올 것 같기도 한, 비상대기 상태의 고요함이다. 아니, 언젠가 그가 웅덩이 속에서 빠져 나와 햇볕과 풍요와 안락의 편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그의 바다는 텅텅 빈 공복으로 가득, 출렁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학의 始原이 공복이다라고 단정짓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의 문학의 궁극이자 삶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는 없을지 모른다. 그 키워드는 이 세계 안에 있는 삶의 모든 티끌일 수도 있고 결국,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다. 또한 그것은 이 세계의 모든 내면이고 이 세계의 모든 이면일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없다. 없으므로 시인은 쓸쓸하다 말하고, 없으므로 시인은 사랑한다 말하고, 또한 세계 안에 浮遊하는 모든 것일 수 있으므로 시인은 오히려 결핍으로 가득 찬다. 아니다, 모든 허공이고 허공에 가득 찬 그 무엇이기 때문에 그는 꿈꾸고 노래하고 시를 쓴다.

1996년 고려원에서 나온 제3 시집 《견인차는 멀리 있다》에 소개된 그의 약력을 대충 옮겨 본다.

경북 상주 출생. 경북대 사대 국어과 및 동대학원 국문과 졸업. <한국 근대시에 나타난 바다 이미지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 받음. 197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봄은 가고 또 봄은 가고》 (1982) 《 절망의 이삭》 (1992). 시론집 《시의 이해》. 산문집 《너에게로 가는 길》 출간. 현재 대구 교육대학교 교수. <시와 반시> 기획편집인.

이외에, 그는 1970년대 후반 <자유시> 동인에 합류해서 해체될 때까지 활동해 왔다는 사실 하나를 더 첨부할 수 있다.

어떻게, 한 사람의 시인을 몇 줄의 글로 요약할 수 있을까만 시 <거미에게>에서 언술한 그의 말처럼 이 몇 줄의 글자 위에 주민등록번호와 ‘사진을 붙이’면 그는 일단 ‘완성’된다.

꽃피는 봄에/ 이력서를 적는다./ 큰 산에 가로 막힌 나의 본적과/ 해마다 바뀌고 또/ 다시 바뀌어야 할 주소를 적는다/ 몇 개의 덧니와 발바닥의 뚝살/ 공복과 가려움,/ 등등의 군살은 빼고 되도록 간추린 과거를/ 양식에 맞추어 기록한다./ 우측 상단에/ 흑백으로 인화된 사진을 붙이고/ 捺印을 한다. <위 사실과 틀림없음>을,/이것이 <나> 임을 확인하기 위하여,

─ <거미에게> 부분

1976년 데뷔 그해부터 세기의 끝인 1999년 오늘까지, 더듬거리며 그의 문학적 괘적을 따라가 봤다. 그러나 문득, 장황한 이 글이, 사진을 붙여 완성시키는 이력서보다 나을 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송구스러워진다. 잡다한 이야기들보다 시인의 더 많은 좋은 시들을 소개했어야 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여백마다 어른거리는 시인의 깊은 내면, 그 붉고 깊은 바다의 심연까지 내려갔어야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시력 20년이 넘었음에도 그는 아직 젊지 않은가. 그것을 빌미로, 그의 삶과 문학을 잘못 읽었을지 모르는 나의 모든 판단에 위로를 보낸다. 그것은, 아직 그가, 시를 써 온 날 만큼 써야 할 날들이 많은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삶과 문학에 대한 결산은 더 먼 훗날 누군가에 의해서 정리되어 질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오래, 그는 생맥주와 노래방을 좋아할 것이고 바바리 자락 펄럭이며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세상은 다시 시인을 북쪽 구석에 몰아넣어서는 안되고 다시는 그가, 억울하고 치사한 세상을 향해 피 끓는 노래로서 저항하지 않아도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제, 시인의 <지난 시간의 피눈물>들을 세상 밖으로 떠나보낸다. <목마른> 시대의 <춤을 위하여>. 시인은 <한번 더 꿈꾸고 한 번 더 노래>하라. 노래가, 목마른 시대를 적실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