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이승훈

   


나를
소멸의 그 깊은 난간으로
데려가 다오

 

 

·장경기

 

 

이승훈이라는 X

 

1942년 강원도 춘천 출생, 박목월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1962년 등단. 《현대시》동인, 1969년 시집 《事物A》 간행, 1976년 《환상의 다리》 그후로 《당신의 초상》 《사물들》 《당신의 방》 《샤갈》 《너라는 환상》 등으로 이어지는 그의 시집들, 그리고 시론집들, 한양대 국문과 교수 등등……이승훈이라는 그물에 걸려나오는 그의 분신들, 혹은 상징, 혹은 기호들. 그러나 이승훈의 시를 읽고 있으면, <이승훈이라는 X>와 그의 詩는 표면적인 이력들과 오히려 장애물처럼 다가온다.

 

일상적인 독법을 거부하는 <이승훈이라는 X>

 

그의 시들은 설명되기를 거부하는 짙푸른 심연으로 다가왔다.매스를 가하고 싶은 집요한, 의무감 같은 충동으로 그것에 칼을 대보았지만, 그것들은 이내 번번이 변질되어 버렸다. 마치 그물질해서 꺼내는 순간 그 퍼덕거림은 곧 사라지고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심연 속의 물고기들처럼, 개별적으로, 단편적으로 꺼내어지기를 거부하며, 거대하나 한 덩어리인 바다로 <이승훈이라는 X>는 있었다. 모든 시들의 모든 단어 하나하나까지 촘촘히 서로 결합된 채, 해체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오히려, 매스를 던져 버리고, 그 깊은 심연으로 잠수해 들어갈 때, 그 속으로 빨려들 때, 제 무한한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달콤한 폐허, 그 징그러운 그리움이, 피의 단내가, 그 독약 같은 우수가, 흔들리는 달빛의 망토가 펄럭이는, 노오란 꽃들이 암흑의 잠을 뚫고 마침내는 출렁대는, 한 마리의 흰 닭이 구구구 잃어버린 목을 찾아 달리는, 고독하고 절규하고 절망하고 이윽고 가라앉는  이승훈의 바다 속으로 비로소 깃들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이승훈을 아는 유일한 방법은  독자 자신이 직접 매혹의 바다 속으로 잠수해 들어가는 것뿐이다,

 

이승훈이라는 매직아이

 

이승훈의 독법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독자들을 위해서, 이성의 논리나 감성의 논리 저편에 자리하고 있는, 이승훈의 시에 접근할 수 있는, 소박한 방법 하나를 소개한다. 그것은 얼마 전에 유행했던 매직아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들의 이면까지 들여다 보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 방법을 이승훈 독법에 적용해 보는 것이다.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자신의 논리로 꽤 맞추려 하지 말고 편안하게, 출몰하는 이미지들을 즐기듯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 속으로 자신이 녹아드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특유의 운율 속으로 젖어들게 되며, 어느덧, 매혹적인 세계 속으로 자신이 들어가고 있음을, 자아를 찾아 방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리라. 그 세계는 예상외로 매우 친숙하며, 깊고도 풍성한 심연임이다.

이러한 독법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다소의 위험성을 무릅쓰고, 이승훈의 詩들을 짜집기 형태로 실었다. 이런 식의 시도를 해 보일 수 있는 작품은 아마도 李箱 이후로, 이승훈 뿐일 것이다. 그런 만큼, 그의 시의 특징을 가장 단적으로 드러내는 면이기도 할 것이며, 필자가 이런 시도를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곳은 어미의 자궁만큼이나 포근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혹은 낯선 미지의 지대를 탐험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가공되기 이전의 어떤 원형을 만날 수도 있으리라. 가슴 절절한 戀書로 다가오기도 하며, 수천의 이미지들이 흐르는 幻想으로 다가오기도 하리라.

나를 혹은 너를 혹은 그를 그러나 결국은 나를 찾아가는, 투명한 병자같이 희디흰 자궁 속을 지나, 깊은 계단을 날 수 없어 따박따박 오르는 희디흰 닭, 혹은 환상의 섬 찾아가는 지독한 방황꾼 하나를 만나리라.        환상이라는 이름의 驛은 동해안에 있다. 눈 내리는 겨울 바다 ─ 거기 하나의 암호처럼 서 있다. 아무도 가본 사람은 없다. 당신이 거기 닿을 때, 그 驛은 총에 맞아 경련한다. 푸른 파편처럼 바람부는 밤에 환상이라는 역이 보인다. 나는 떠난다. 이 바람부는 서울에서 다른 세상으로 떠난다. 너는 꿈의 현실, 날개의 공기 달콤한 소금. 이제 모래투성이 날들은 사라지리라. 시방 나는 초현실주의 시를 쓰는 게 아니다. 너는 카페에 앉아 유리창 너머 흐린 하늘을 본다. 그러나 너의 눈은 환희의 고독 이 세상엔 없는 불타오르는 부재 보석의 피 몸부림치는 별들의 키스 눈으로 덮인 새벽이다. 언제나 너를 보며 나는 이 추운 도시에서 따뜻한 나라로 콘크리트가 없는 나라로 향기의 나라로 초생달이 뜬 밤 빵으로 뒤덮인 길을 달린다. 너는 기쁨의 공포 살의 번개 저녁의 새벽 얼음의 불 사과나무의 바다 어디에도 없는 길 진창에서 솟아오르는 하늘이다. 오늘도 내가 핥는 토끼이다.

 

나를 소멸의 그 깊은 난간으로 데려가 다오. 아아 캄캄한 하늘에 누가 가느다란 초록빛 선을 긋는다. 아이들이 사방에서 쿵쿵 뛰며 멀고 먼 살들의 낭하로 몰려간다. 나는 어두운 하늘에 작은 벌레를 그리고 퍼어런 팔들이 비명을 지르는 바다에 붉은 달을 그린다.

설사 꿈이더라도 가슴 터지는 원통한 악연이더라도 너와 나의 황혼 속에 들어 있는 이 사랑이 부르조아적인 허위더라도 이 사랑이 마약이더라도 애인아 설사 너를 속이더라도 이게 저문 시대의 길이고 병든 서울의 꿈이고 느닷없이 가을날 너를 찾아와 너를 덮친 이 사랑이 이 징그러운 그리움이 이 달콤한 폐허가 이 피의 단내가 파고드는 황혼 모든 지식은 허위다 느낌이 진리다 설사 꿈이더라도 꿈이 해방이다 눈이 내릴 것만 같은 가을 저녁 너를 사로잡는 이 갈증 속에 들어 있는 독약 같은 우수 사납게 물들이는 이 번개 이 우뢰 끝없이 파고드는 너와 나의 황혼, 나를 노엽게 하고 들뜨게 하고 굶주리게 하고 갑자기 나타나고 갑자기 사라지고 칼날이고 번득이고 숨막히고 머뭇거리고 머뭇거리며 다가오는 희망이고 머뭇거리며 다가오는 절망이고 말도 못하고 하루종일 문만 열고 그처럼 참을성 없는 나를 때리고 그처럼 참을성 없는 지구가 되게 하고 울부짖는 굴뚝보다 사라지는 연기가 되게 하고 절벽이 되게 하고 절벽 아래 바다가 되게 하고 마침내 나를 바다로 뛰어들게 하는 아아,…… 葬送의 바다에는 흔들리는 달빛, 흔들리는 달빛의 망토가 펄럭이고 나의 얼굴은 무수한 어둠의 칼에 찔리우며 사라지는 불빛. 램프가 꺼지고, 갈매기 하나 유리창에 부딪쳐 피를 흘린다.

 

별들이 알을 까기 시작한다. 기일게 늘어진 어둠의 혈관이 벌레 울음소리가 은폐된다. 나는 침몰하고 있다. 노오란 꽃들이 암흑의 잠을 뚫고 마침내 출렁대는 시간의 內壁…….나를 불러 다오. 너를 안으면 어둠이 사라지고 바람 불던 저녁도 사라지고 무슨 정신도 사라진다 너를 안으면 병든 거리도 소리없이 사라진다 너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면 마흔 개의 어둠이 사라지고 너의 얼굴에 나를 묻으면 마흔 개의 감옥도 사라지고 만성 신경증에 시달리던 밤들도 사라진다 너의 가슴에 손을 대면 나의 손도 사라진다 이젠 네가 있으니까 이젠 네가 나이니까 너의 가슴 속으로 희디흰 비명을 지르며 침몰했다.

 

커튼을 하얗게 태우는 빛살, 희디흰 방, 내가 거기에 닿는 순간, 흔들리는 창에 물드는 아아 사라지는 것들의 무수한 중얼거림…….세상에 모든 백지 위에 하얀 눈길 위에 내리는 햇살 위에 네가 있다. 감기로 앓던 침대 위에 펼쳐놓은 책 위에 비치던 램프 위에 네가 있다 겨울 저녁 들판 위에 해가 지던 운동장 위에 흔들리던 계단 위에 네가 있다. 봄이 오던 아스팔트 위에 비에 젖던 창문 위에 네가 있다. 번쩍이던 물고기 위에 하루종일 내리던 햇살 위에 하얀 모래 위에 네가 있다. 고요한 산길 위에 여름 저녁 산비탈 위에 네가 없는 시간 위에 네가 있다. 시린 어깨 위에 사라지는 노을 위에 하나씩 켜지는 불빛 위에, 안 보이던 시간이 총에 맞아 떨어지는 식탁 위에, 파헤쳐진 너는 새로 날아와 쓰러졌다.

 

나는 손이 없는 손으로 어루만졌다. 훌쩍이며 울고 있는 동해 새벽, 바다에는 달이 지고 있었다. 바다 수평선에서는 커튼들이 무수히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도 가본적이 없는 환상이라는 이름의 역이 거기 수평선, 커튼이 흔들리는 곳에 있었다. 가을이 하나 와 머문다. 너는 들국화처럼 피어 있구나 화만 나던 날들이었다고 ……. 이 방이 누구의 방인가 더러운 더러운 누구의 방인가 얼굴 붉히며 우리 처음 만났던 방인가 칼날 같은 외롬으로 우리 서로 포옹한 방인가. 이 허술한 이 우울한 이 축축한 향기만 남은 방이 누구의 방인가 이 방엔 사람이 없는데 이 방엔 책들도 없는데 이 방에서 나는 시를 썼는데 아아 소리치며 내 두 팔이 끌어안으면 아직도 살아 파르르 떠는 이 방이 누구의 방이길래 나는 아직도 이 방을 떠나지 못하나? 쓸쓸한 사람 곁에 누워 있는 비쩍 마른 나는 무엇이며 흘러간다는 것은 무엇이며 비 내리는 밤 문득 들리는 네 가슴의 시냇물 소리란 무엇인가 치욕이란 무엇이며 추위란 무엇이며 생활이란 무엇인가 어둠 속에 불을 켜고 잠이 안 와 돌아눕는 이 외롬이란 무엇이며 어둔 창을 열고 약을 먹는 나란 무엇인가 그런 게 모두 무엇인가 어둠 속에 잠시 타오르는 불빛 불빛 같은 것 그런 게 모두 무엇인가?“여보세요. 혹시 슬프시다면 제가 행복을 만들어드릴까요? 겨울 하나가 구름을 따서 당신 허리에 매어 드릴까요? 사실, 네, 네, 저는 꿈이거든요. 겨울 저녁 중곡동 벌판에서 저를 만나셨지요. 놀랄 건 없어요. 저는 형태가 없으니까요. 實刑을 받았지요. 저는 海低에 얼굴을 파묻고 오늘도 시시하게 살아요.”

파란 시간은 식탁 위에서 널부러진 채 자고 있었다. 고양이마냥 슬금슬금, 아니 가느다란 배암이 되어 실내를 조용히 벗어나며 금이 가는 상상의 컴컴한 정원에서 울고 있었다. 어느 결별을 가슴 아파해야 했다. 이 팔도 이 머리도 무수한 너로 덮인다 그렇다 내가 걷는 게 아니다 무수한 네가 걷는다 거리를 걸어가는 너 시장을 보러 가는 너 운전을 하는 너 친구들 속에서 더욱 외로워지는 너 해질 무렵 유리창에 물고기를 그리는 너 편지를 쓰는 너 기다리는 너 돌아눕는 너 그런 네가 나를 이룬다 나를 이루고 나를 부수고 다시 이루는 끝없이 돌아가는 무수한 너!너를 만난 날은 필연의 날이었다 머리에서 손이 빠져나오고 다리에서 얼굴이 튀어나오던 허리에서 설탕이 쏟아지던 불안, 비참, 치욕 따위가 지루하고 맥이 없던 날들이 모조리 일어나 빛이 되던 아아 내 어깨 쭉지에 문득 날개가 돋던 날 너를 만난 날. 여름 해 시커멓게 탄 이마와 가슴으로 병든 두 팔로 억세었던 슬픔으로 그렇다 너를 찾아간 것은 3년이 흘렀기 때문이다. 싸우고 뒹굴고 다시 일어서던 형편없이 곯아버린 3년이 속절없던 문학이 예술이 흘러갔기 때문이다 너를 찾아간 것은 차분하게 나를 용서하고 싶어서였다 망설였던 기나긴 삶, 물에 잠긴 밤들을 혹은 가엾던 마음들을 천하디 천한 그리움들을 칼날 같은 것으로 녹이고 싶어서였다 너를 찾아간 것은 허나 끝끝내 피투성이 되어 돌아선 것은 ……. 아아 너를 본 순간 물고기가 뛰고 장미가 피고 너를 본 순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너를 본 순간 그동안 살아온 인생이 갑자기 걸레였고 갑자기 시커먼 밤이었고 너는 하아얀 대낮이었다 너를 본 순간 나는 술을 마셨고 나는 깊은 밤에 토했다 뼈저린 외롬 같은 것 너를 본 순간 나를 찾아온 건 하아얀 피 쏟아지는 태양 어려운 아름다움 아무도 밟지 않은 고요한 공기 피로의 물거품을 뚫고 솟아오르던 빛으로 가득한 빵 너를 본 순간 나는 거대한 녹색의 방에 뒹굴고 태양의 가시에 찔리고 침묵의 혀에 싸였다 너를 본 순간 허나 너는 이미 거기 없었다

나는 낳는다 슬픔의 대포알 치욕의 대포알을 나는 낳는다 킬킬대는 밤 떠돌다 익사하는 밤 떡과 고기인 밤 혹은 피인 밤을 나는 낳는다 이토록 스산하고 커다란 머리인 밤 루비처럼 빠알간 밤 형님처럼 시커먼 밤을 나는 낳는다 눈부신 추억의 털투성이 밤을 나는 낳는다 밤의 얼굴 위에 이제 인간들은 보라 밤이 나를 낳으면 나는 밤을 낳는다 허나 우리 서로 사랑한 밤 누우런 떡잎 같은 밤 아직도 계속되는 기나긴 밤을 의자도 꿈도 없이 사는 거다 벽하고 벽하고 사는 거다 집도 없이 가방도 없이, 너도 없이 너도 없이 사는 거다 사는 건 어렵다 사랑도 어렵다 노도 없이 시계도 없이 사는 거다 잠들기가 제일 힘들지만 눈을 감고 사는 거다 찾을 것도 없고 다시 시작할 것도 없고 너무 늦은 것도 아니고 너무 빠른 것도 아니고 물결따라 카사블랑카에 사는 거다 안개 속에 안개 속에 사는 거다 불빛도 술도 없는 날들이 올 거다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싯벌건 노을이 타는 가을 저녁, 앓으며 사는 거다

망또는 언제나 낡은 망또다 곤두서서 사는 거다 원래 내 것은 없었다. 모두 떠나고 카사블랑카에 사는 거다 카사블랑카에 머무는 거다 카사블랑카에 술을 마시며 사는 거다 카사블랑카엔 안개가 끼고 공항엔 비행기가 떠나는 거다 비행기엔 한 여자가 앉아 있는 거다 카사블랑카에 카사블랑카에 의자도 꿈도 없이, 꽃잎은 꽃잎대로 흐드러지고 어깨는 어깨대로 야위고 뼈는 뼈대로 부서지고 비쩍 마르고 고양이가 다 되고 밤이면 야웅대는 해골이 다 되고 그리고 그리고 골목을 기어가고 헤매고 살고 죽고 그리고 그리고 웃었다 씨발놈 조용히 웃고 울다 웃고 3년을 살고 비가 오고 눈이 왔다 더 많은 원수들 속에서 이를 갈며 살고 빌어먹으며 살고 얻어맞고 흐드러졌다 “오오 머얼다 가늘고 햇볕 속에 뛰는 물체여 너의 내부에서 쏟아져 나오는 의자들 하얀 소리 또는 퍼렇게 타버리는 발톱 열 개 가을의 마지막 一日의 사랑 邪戀에서 邪戀으로 가는 길은 머얼다.”도대체 내가 그 나라에 간 것이 오류였다. 그 나라엔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았다. 나는 꽝꽝한 얼음 속에서 처음으로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는 한토막 흐린 나무가 되어, 그래도 나를 보자 웃으셨다. 땅도 하늘도 없는, 저 얼음나라에서 그러나 나는 따스하게 존재했다. 고함마저 그때는 지를 수 없었으므로…….

“저녁 밥상과 아편과, 우는 새끼와, 비가 새는 방들을 저는 기억합니다. 억울하기 때문에 눈만 남은 여름, 형편없는 시의 국물 길에 엎지르며 저는 걸어왔습니다. 아버지. 서른 살에도 저는 너무 춥습니다.

 

아버지! 에덴의 동쪽엔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에덴의 동쪽엔 해가 지고, 낙엽이 지고 있었습니다. 술에 취해 엉망이었고, 달아난 인생과 우울과 배반과 질병과 상처로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에덴의 동쪽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믿었던 사람도 돌아서면 지옥이던 시간에 에덴의 동쪽에서 에덴의 동쪽에서 술에 취해 비틀대며 날 좀 도와 줘! 에덴의 동쪽엔 싸움이 있고 병든 남자가, 비가 내리고 노동자가 살해되고 짙은 안개가 끼고 알콜 중독자 미친 놈들만 살았습니다. 미친듯 커다란 아가리에서 자기를 꺼내 밖으로 던지고 미친듯 미친듯 미친듯…….”“제발 그쳐 다오.”

“………”

이윽고 칼자루를 쥔 손이 나타난다. 나는 일어선다. 나이 서른 둘, 아내 하나 새끼 둘, 직업 대학교수. 심문과 대답은 어제와 동일하다. 법정에 가득한 햇살들이 웃기 시작한다.

“네가 방황죄를 저지른 시인 이승훈이냐”

“구름은 푸르다”

“어른인 너는 왜 거리에서 부단히 방황했느냐”

“그렇다”

“돈이냐”

“기러기와 거위”

이윽고 칼자루를 쥔 손이 사라진다. 나는 처단된다. 나는 앞으로 30년 간 하아얀 방에 해가 진다. 하아얀 방에 바람이 불고 하아얀 나뭇잎들이 바다가 된다. 나는 그렇게 30년, 방에서만 살다가 죽는다. 이 세상, 나는 방황했기 때문에. 나의 방에 유폐되다.

 

그래 그럼 그렇지 그래 아니야 그래 당신을 이해… 그럼 이제 나는 무얼 하지? 허나 밤이 좋다 악몽만 있는 밤이 창백한 망치로 두드리는 밤이 나를 나에게서 분리하는 밤이 나는 좋다 꿈 속에 떠 있는 밤 의식 없는 밤 나는 밤의 주인은 아니지만 밤의 주인은 떠난지 오래다 몇 번이나 돌아누우며 바람 소리만 들리는 밤 아무도 없는 밤 한 번도 꿈꾸는 나를 제대로 볼 수 없는 밤 과거만 있는 밤 코도 없는 밤 코만 있는 밤 지남철도 없는 밤 이 구부러진 밤이 나는 좋다 휠더린의 궁핍한 시대도 미래도 모조리 잠든 밤 불빛도 불빛도 죽은 밤 비행기도 없는 밤이 나는 좋다 누가 뭐래도 좋다 영혼 따위가 없는 밤 악몽만 있는 밤 한없이 식어가는 육체만 있는 이 밤이 나를 나에게서 분리하는 이 밤이 나는 좋다 너무 좋아서 이윽고 나는 밤을 꽉 깨물어 버린다.

형무소 뒷길 하느님 막막한 잿빛 시간을 초월하여 시간은 움직이지 않고 시간은 머얼다 공상의 냄새 때문이라면 의심마저 죄악이다 畵具 하나가 형무소 뒷길에서 웃기 시작한다 發狂하기 시작한다 하하하 그러니 죽어라 죽은 시간의 피는 달다 오오 하느님 그리고 땅 사람 다시 말해 공기 오오 사람 그리고 땅 돌이 많은 땅이 있고 사람 공기가 있고 하느님 다시 말해 사슬이 있고 시간을 알 수 없다 형무소 뒷길 버려진 채 돌고 있는 私生兒 잿빛 그토록 말라빠진 나!

나는 관계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어떻게 이혼할 것인가 새벽에, A와 나는 어떻게 결혼을 취소할 것인가 대낮에. 나는 A를 없애려 권총을 만든다. 물론 나의 권총에는 총구가 없다. 죽여야 할 놈은 이미 시체이기 때문이다. 죽여야 할 놈은 바로 나 아아 시체여 시체여 시체여. 시린 벽에 못을 박고 엎드려 나는 이름 부른다. 이름은 가혹하다. 바람에 휘날리는 집이여. 손가락들이 고통을 견디는 집에서, 한밤의 경련 속에서, 금이 가는 예정 속에서 이름 부른다 이름 부르는 것은 계속된다. 계속되는 밤, 누우런 아침 해 몰려오는 방에서 나는 포복한다. 진득진득한 목소리로 이름 부른다. 펄럭이는 잿빛, 어긋나기만 하는 사랑, 경련하는 존재여, 너의 이름을 이제 내가 펄럭이게 한다.

붉은 고함을 지르며 달리는 것은 자정이다. 피를 보고 놀란 두 눈이 절망의 현미경을 오래 보는 두 눈이다. 누가 이 땅에 태어나 푸른 별 박히는 내 머릿속 고함을 듣는다. 한없이 떠내려가는 붉은 고함을 지르며 가라앉는 시퍼런 바다 바람부는 밤에도 울음들이 떠 있다 기인 팔들이 휘어안은 마음의 풀잎이 칼을 토하고 징그러운 남자의 칼 따스하고 무섭게 번쩍이는 칼 피를 보고 놀란 두 눈이 절망을 오래오래 바라본다. 유년의 별이 낭자히 떨어지는 아 시간의 깊은 고함소리 불의 혀가 키스하고 기갈처럼 허어연 폐벽을 스치며 달리는 것은 자정이다. 기름에 젖은 문명이다 한없이 떠내려간다.

탐욕도 절망도 없다. 나는 아직 웃을 수 있다 뼈 속의 기인 햇볕을 열고 들어간다. 밖에는 비가 온다 아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온통 희다 사라진 흑색을 씹으며 들어간다는 짓도 이제는 끝장이다.

B도 C도 도주한다.

나의 팔이 달아나고 한 마리의 흰 닭이 구 구 구 잃어버린 목을 좇아 달린다. 오 나를 부르는 깊은 命令의 겨울 지하실에선 더욱 진지하기 위하여 등불을 켜놓고 우린 생각의 따스한 닭들을 키운다. 새벽마다 쓰라리게 정신의 땅을 판다. 완강한 시간의 사슬이 끊어진 새벽 문지방에서 소리들은 피를 흘린다. 그리고 그것은 하아얀 액체로 변하더니 이윽고 목이 없는 한 마리 흰 닭이 되어 저렇게 많은 아침 햇빛 속을 뒤우뚱거리며 뛰기 시작한다.

 

소리지르는 푸른 얼굴이 내 속에 산다 하염없이 빛나는 하염없음 아무래도 잘못된 모양이다 소리의 나라엔 말들이 뛰고 학살되고 엄청난 달이 가득 들어가 박힌다 헤매는 하염없이 빛나는 하염없음 아무래도 잘못된 모양이다 한사코 이 밤을 완성치 못하고 어디론가 떠나는 나 아무렇게나 빛나는 달 아무렇게나 빛나는 生 혹은 파괴의 애무의 절정의 얼굴 하나 뜯어먹으면 하염없이 빛나는 하염없음 아무래도 잘못된 모양이다 소리 푸른 말들이 뛰는 이 스산한 밤의 미소!피는 불이 되고 붉은 연기가 된다 이제 나는 연기다 나는 풀 풀 풀 날린다 시간이 딸꾹질하는 뇌에는 연기만 가득하다 또 가을이다 굶주림이 몰려온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 쓴다 그러면 방안에 가득 차는 하아얀 닭들이 밤새도록 푸드득거리고 나도 덩달아 푸드득거린다그러니까 병이 든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인가? 병이 들 때 내가 맞이하는 저 들판, 해질 무렵 유리창의 햇살, 깊은 밤 언덕을 덮던 하아얀 눈, 문득 누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 마후라를 두르고 골목을 돌아가던 그해 겨울 오전 열 시의 햇볕, 골목에 가득 쌓인 눈과 한없이 푸르던 해, 해 따위는 모두 내가 병들어 누워 있을 때 찾아가는 작은 驛들이란 말인가?그러니까 나는 뼈 고독하고 절규하고 절망하고 이윽고 가라앉는다 온갖 나태와 모멸과 피로에 찌든 나는 뼈 내가 주인이 아니고 밤이 주인이다 그러니까 야옹거리는 고양이가 주인이다 제발 집어쳐! 허지만 나는 뼈 몽상은 가짜다 악몽과 한숨과 식은 땀이 진짜다 지금은 사라진 그 사람의 눈이 지금은 사라진 그 사람의 코이다 어디 한번 손을 대면 와르르 부서지는 뼈 어두운 흐릿한 사라지는 이 의식의 오렌지 대포 오오 제발 집어쳐!

나를 유폐시켰던 아버지는 바람을 일으킨다 나는 바람 속에 처박힌다 벌판에서 벌판의 피를 뜯어가지고 나는 다른 벌판을 만든다 아버지는 홍수를 일으킨다 내가 만든 벌판이 떠내려가므로 나는 홍수 속에 처박힌다 홍수의 얼굴을 뜯어가지고 나는 커다란 푸른 담요를 만든다 아버지는 火災를 일으킨다 내가 만든 담요가 불에 탄다 나는 불 속에 처박힌다 나는 불 속에서 불의 손톱을 뜯어 공기를 만든다 불 속에서 내가 만드는 공기를 아버지는 짓밟는다 나는 火傷을 입는다 공기의 재를 털고 가까스로 일어나면 새벽, 아버지는 악어를 찾아 떠나고 나는 악어가 되어 헤맨다 아아 하얗게 달아나는 금이 가는 하늘에 무심한 새 하나 끼어 죽는다 물론이다 날개도 죽지도 없이 하늘의 공포와 입맞춘다 어떻게 견디란 말인가 달려오는 시간의 모래 하늘에 가득 차는 惡夢 손도 발도 없이 부러진 죽지로 아아 어떻게 방향을 꿈꾸란 말인가. 입술은 바람이 되고 눈망울은 천둥이 되고 심장은 돌이 된다 괴롭던 일 기쁘던 일도 화만 나던 사랑도 후회도 이제는 님이 빚어야 할 한줌의 흙 바다 혹은 하늘. 고양이처럼 살고 싶어라 엎드려 있고만 싶어라 고운 피 흘리는 마음 복사꽃 복사꽃 피는데 어디로 가고만 싶어라 이 어두운 마음 밝아오는 해이고 싶어라 아무리 채찍이 갈겨도 그리움은 끝나지 않어라 당신 얼굴에 입맞추고 싶어라 하아얀 돌이고 싶어라 파아란 구름이고 싶어라 모조리 버리고 오늘 바쁘게 명동을 걸어가면 바람부는 왕십리 걸어가면 고양이처럼 살고 싶어라 언제나 다른 나라에 계신 당신 고개 한번 끄덕이면 복사꽃 복사꽃은 지는데 오늘도 나를 삼키는 비쩍 마른 사상 칼날 같은 추억 20년이 넘게 절뚝거리는 도시 텅빈 광장 애인이 씹다 버린 빠알간 사과 똑딱거리는 시계 오늘도 나를 삼키는 벽을 향해 질주하는 학생들 곤두선 학문 이름이 없는 고통의 폭약 허허벌판의 술 나는 벌떡 일어난다 이제 나는 땅바닥에 침을 뱉진 않겠다 입술이 없는 삶도 코가 없는 삶도 어쩌면 가을해가 흘리던 비린내도 너도 나도 박쥐도 병든 길을 확인하고 도대체 이런 식으로 살아야만 하는 걸까 창백한 손으로 시뻘건 잉크로 시방 내가 쓰는 시 다른 마음이 쓰는 시 오늘도 골목에서 술만 마시는 아버지 펑펑 쏟아지는 해 오늘도 약방에서 약을 사는 아우 하아얀 창백한 버섯꽃이 피는 그림자의 폭포 오늘도 나를 삼키는 그림자의 폭포와 해와 벙어리와 흘러가는 나날 모두 벌떡 일어나 더욱 커다란 이성으로 나를 감싸라. 입 속에 회오리치는 건 마흔 해 동안 떠도는 한 마디 말, 허나 한 번도 형태를 지니지 못했던 한 마디 말, 겨울 바다에서 처음 떠오르다 그대로 박혀버린 말의 씨앗인 말 혹은 병원, 속초 바다에서 거지가 되어 헤매던 시절의 내가 거듭 만난 한 마디 말, 마흔 해는 사실 얼마나 짧은 하루였던가, 아직도 말할 줄 모르는 나의 입 속에 회오리치는 말은 영원히 닫힌 말이고 영원히 열린 말, 한 번도 발음할 수 없었던, 그러니까 내 살인 말, 깊은 밤이면 참담하게 흘러가는 病院船이고 새벽이면 마구 쏟아지는 폭격기이고 한낮이면 하늘에 박혀 있는 새이고 저녁이면 또 어지러운 벼개인 한 마디 말! 결국 나는 너이다.

 

너가 있기 때문이다 네가 죽어가기 때문이다 나는 있다 네가 죽어가기 때문에 나는 네 속에 박힌 돌이기 때문에 나는 너의 입 천장 같은 꽃잎 아니 나는 너의 배꼽 나는 너의 발 너의 발은 눈물이다 너의 발은 너의 손이다 너의 발은 뛴다 공기 속을 첨벙대며 멈추지 않는 것 비로소 눈을 뜨는 것 비로소 너의 눈 속에 타오르는 것 너의 눈 속에 타오르는 언덕과 타오르는 강물과 너의 눈 속에 타오르는 새와 웃음과 흐느낌과 결국 나는 너이다. 네가 오기 전 내 인생은 쓰레기 내 인생은 과거 내 인생은 얼음 네가 온 다음 내 인생은 백지 내 인생은 미래 내 인생은 물 허나 너는 달아나고 너는 기다리지 않았다 불안과 죄 혹은 예수는 아아 아직도 내 인생!

 

─ 이 글은 이승훈의 시들을 짜집기한 것임

 

이 선생 근황은?

 

“변형산문시를 쓰고 있어요. 산문시체로 내려가면서 바른 쪽을 쳐내는 형식이죠. 최근까지, 꽤 오랜동안 써왔던 행이 짧고 호흡이 짧은, 그래서 속도감이 있었던 시형식에 변화를 가져온 거죠.

벽에 부딪쳤거든. 내용도 그렇고 형식도 그렇고, 끝가지 밀고나가는 데까지 나가다 벽에 부딪치면 그때는 변형을 줄 수밖에 없죠. 변형산문시도 그런 맥락에서 시도하는 거지요. 형식이 내용을 결정한다는 입장이니까요. 올 가을에 시집으로 묶을 예정인데, 산문시의 성격인 만큼 서사적인 요소를 많이 담게 되리라고 생각돼요."

 

(1995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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