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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이성선
나무들도 생각이 많아요 ― 설악인 이성선
김강태
영혼 깨끗, 눈동자 따뜻 나는 거울 앞에 선다. 손을 들어 이마를 닦는다. 가슴이 덜컹거린다. 다시 눈가를 밀어올린다. 계속 밀어대니 눈망울이 아프다. 이성선 형이 ‘영혼이 깨끗한 사람은/눈동자가 따뜻하다’고 했기에. 나는 형의 형상을 그린다. 몇년 만인가, 91년 봄에 만났으니. 한 7년 정도? 시선집을 펼친다. 《빈 산이 젖고 있다》(미래사, 1991)의 서문1)이 눈에 들어온다. 곧이어 <발자국>(전문)2)이 눈에 선하다. 형의 시는 그저 유려한 산문이고 산문이 그냥 시다. 하냥 소년이다. 그의 흰 결潔이 곳곳마다 숨어 있다. 순결감이 넘치지만 내면에 푹 익은 염결성이기도 하다. 그는 <별을 보며>에서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하며 지나칠 정도로 자의반 자괴심에 빠진다. 이어서 ‘바라보면 너 눈물 같은 빛남/가슴 어지러움 황홀히 헹구어 비치는//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나는 무엇으로 가난하랴’ 하고 안으로 외친다. 이 시를 보면 그의 염결성이 추구하는 건 ‘깨끗한 가난’이다. 영원한 감자바위 소년 이성선을 만나러 가는 겨울날은 비가 궂었다. 청량리역 부근 상봉 터미널에서 간성(속초 못 미처)까지 4시간 45분에 11,400원. 고속은 우등이 동마장/강남 터미널에서 5시간에 15,000원이다. 형은 선생님으로 있었다. 고성중학교, 비에 씻기는 교사校舍는 빛날이 섰고, 저 멀리로 산맥 줄기가 하얀 능선을 뽐내고 있다. 산정에 눈이 내리는 게 분명해, 이렇게 주억거리며 나는 이성선 시인을 찾는다. 실업과 이성선 선생은 ☎ 0392)681~6047 상담실에서 사회과 許桂姬 선생님과 함께 있었다. 그녀는 난설헌 초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작은 아이들이 여교사와 상담중이었다. …겨울비라니. 그래도 시골 중학교는 질금거리는 빗속에서 제법 깨끗하다. 뒷건물을 건축하기 전엔 설악이나 산정이 멀리 보였어요…. 허 선생이 따뜻한 차를 끓이며 말을 던진다. 눈이 맑은 그녀는 말쑥, 다정하다. 작은 충동으로, 그녀를 반 강제로 내 사진기에 담는다. 두 사람 사이의 부끄러움, 취재를 오래 하다보니 뻔뻔해졌노라고 나는 유난히 눙친다. (이런 남자를 조심하라. 남자는 다 여우다.) 고성고와 함께 있는 탓인지 뒷건물 중학교는 작아보였다. ☎ 0392)33~3743, 형의 집은 항상 그의 음성이 다감하게 닿는다. 부부만 산다. 부인은 지금도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7살 아래. 부인을 만나 취재하고 싶었지만, 그 날은 마침 모친의 기제가 있는 날이어서 불가능했다. 게다가 아직도 江原은 방학 중이라 만나긴 어려운 터였다. 더 중요한 것은 형이 실상 그걸 별로 원하지 않는 느낌을 준 탓이라 할까. 부인과의 만남 얘기는 아주 간단하다. 강릉 사는 아동문학가이자 후배 교사 한 사람이 함께 길 가던 중에 ‘저 멀리 지나가는 저 아가씨, 어때요?’ 하길래 맘이 들어 결혼했다고. 싱겁다. ‘소망이란?’ 질문에 대해 형은 ‘오로지 좋은 시 쓰고 싶고 명상 시간도 많이 갖고 싶다. 삶이 아름답다는 걸 느끼며 그런 향기를 간직한 채 살아가고 싶다’는 간명어簡明語로 답한다. 참 싱겁다. 그리곤 오직 시와 시정신 얘기 뿐인데 그게 나는 사실 불편했다. 시인의 인터뷰 건이지만, 사람 이성선의 삶의 흔적과 궤적을 확인 추적하러 예까지 멀리 온 것인데…. 내가 굳이 속마음을 드러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첫째는 여러 사람을 취재하는 동안에 나에게 는 게 ‘눈치코치’라는 점이다. 솔직히 말해서 눈치만 빨라졌다. 담소를 나누는 중에도 상대의 불편부당을, 호오好惡의 분위기를, 어서 끝냈으면 하는 심사를, 그런 하치않은 느낌조차 못될 느낌의 조각을, 나는 금방 눈치 채고 만다. 직방 내 말초신경 선을 타고 땡겨온다. 실제로 나를 편히 대해준 이는 많았지만, 진심이 통해 진지한 대화로까지 이어진 경우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나는 악을 쓰고 캐내려 하고, 상대는 대개 내가 캐내려는 중심의 본질과 고갱이, 부끄럼을 감추려 했다. 그(녀)는 상대 대담자 위에 서려고 하며, 자기 자신을 최대한 미화 내지 부각시키려 한다. 이건 옳지 않다. 일반적으로 지금까지는 인터뷰어가 대개는 초보고 대상의 겉을 대충 삶아 먹고 뻥 튀기기를 일삼았다. 시인의 진면모는 시인의 모자람과 모질음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진다. 대부분 내용의 질만 부각시키는데 그게 정말 싫다. 역겹다. 시인도 사람이다. 사람의 겉을 발라내고 사람의 속을 면밀히 캐내야 한다. 나는 인간을 읽고 싶다. 왜 이런 시를 쓰게 됐는지, 그(녀)의 진솔한 삶을 훑고픈 것이다. 그런데 최근 나는 깨달았다. 시인들이 대체로 ‘촌스럽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인터뷰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대개들 상위개념에 존재하고픈 잿빛 속마음이 있어 문제다. 물론 강태가 그들 대가급 시인의 경지를 완전히 파악, 이해하기 어렵다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인터뷰어로서의 강태 자신이 아니라 피회견자interviewee들이 숱한 독자를 의식하지 말고 대화에 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품은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작품이 곧 참 인간이다. 둘째는 나는 그분들의 얘기를 ‘직접’ 들으며 작품성과 연계, 당신을 나름대로 평가하고 싶다는 점이다. 매우 진지하고 솔직하고 인간적인 시인―. 독자들이 꼭 읽고 싶은 대목이다. 산문은 거짓이 가미되기도 한다. 기록물을 통해 작성해도 되는 인터뷰 내용이나, 아무나 써도 되는 인터뷰는 실상 죽은 내용일 수밖에 없다. 시인과의 살아있는 만남은 기록물 이전의 주제가 큰 대화의 줄거리로 다가오게 마련이다. 나는 시인의 삶 반경과 근황 취재를 ‘살’로 보고, 취재 내용이나 저작물을 ‘뼈’로 생각하려고 애쓴다. 살과 뼈는 반드시 함께 붙어있는 법이니까…. 굳이 밝힐 필요는 없지만, 나는 그분들을 만나면서 작은 것이라도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다. 나는 나다.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나는 이 시대의 문단에, 특히 시단에 빚진 적이 거의 없다. 일부 은혜를 받은 분이나 학교 은사님들 외에는. (이성선 시인과는 상관이 없는데, 내가 왜 썼지?) 딴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런 면에서 이번 취재는 아쉬운 점이 있었다. 속초에서 내가 만난 분은 이성선 시인 한 사람뿐이었다. 오직 두 사람만의 대화일 따름이다. 사실 대화의 중심 줄기는 내가 파악한 자료와 소규모의 소품적 생각, 형이 보내준 자료와 서책에 거의 다 있었다. 고성중학에서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형이 차 안에서 여기저기를 소개해 주었다. 산과 바다가 마주하는 사잇길을 달리면서 지역의 특성과 관광지를 대충대충 안내 받았다. 형은 태어난 고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청간정淸澗亭도 그런 식의 소개였다. 차창유리 밖은 구질은 빗소리. 하지만 겨울 보슬비는 맑았다. 다만 형이 관여하는 <물소리 시낭송회>나 교류 문인들을 만나지 못한 건 취재상의 큰 패착이다. 요즘은 시낭송회에도 대중의 참여가 적다고 한다. 종합해 보건대, 형은 마냥 선생님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의 깊으나 소심한 성격탓이다. 이 시인은 표정에 가감이 없다. 늘 그 모습 그대로다. 싫증날 지경이다. 그런데 여전히 좋은 시를 쓰고 있다…. (무언가 잘못 되었다?) 처음엔 형의 시에 행동이 잘 따르지 않는 듯이 보였다. 생각, 상념 투성이인 듯했다. 그는 명리를 떠나보내고 ‘성/속’ 사이에서, ‘선/악’을 다듬으며 살아간다. 때마침 내가 ‘聖/善’이란 이름자와 俗/惡’의 상대 개념을 한꺼번에 들려주자 형이 가만히 웃는다. 이름이 부담스러워 한자로 잘 쓰진 않는다고. 한글로 쓰니 훨씬 마음이 편하다고 전한다. 그는 이런 시인이다. 이름자가 갖는 특별한 의미조차도 부담을 느끼는, 매우 섬세한 시인이다. 그래도 내겐 깊디깊은 내향성의 시인으로 보인다. 그는 늙었다. 다만 눈빛이 빛을 띠고 살아서 그만큼 젊다. 정년에 퇴임하고 싶지 않다는 힘줌말이 내 귀를 때린다. 오로지 시와 함께, 앞으론 시로 쓸 수 없는 부분을 산문으로 써보고 싶다고. 뜨거운 열정은 세월에 그어진, 변치 않은 형의 얼굴에서 감지되었다.
작품 하나, 둘
새벽에 농부는 밭을 간다./쟁깃날에 햇빛이 갈리어/밭고랑에 넘어진다.//고랑마다 번쩍이는 하늘 물소리.//밤내 껴안고 신음하던/마음의 밭뙈기를 꺼내/벌판에 펼쳐놓고/힘껏 갈아가는 농부//넘어지며 부서지며 농부는/밭을 간다./돌밭을 갈고 바람을 갈고 산악을 갈고/아내의 바닥에 고인 슬픔을 갈고/아이의 눈 속에 핀/새소리를 갈고.//그가 갈아온 밭고랑에/고인 눈물/하늘에나 빛나는 가난한 물빛//일생을 갈고 와 이제/황혼의 발끝에 섰다. 그의 발 아래 다 갈려 넘어진 벌판/찢긴 밭고랑에 핏빛으로 타는 놀//노을 속에 끝내 자기마저 갈아버리는/그의 뒷모습이/어둠에 잠기고 있다. ― <耕 作> 전문
남의 전문 산문용어를 쓰고 싶지 않지만, 이 작품은 감상법의 수용면에서 <거리> 개념을 도입, 거론해 볼 만하다. <거리distance>란 미의 ‘관조 가치/욕구 가치 사이’를 뜻하는 용어로 정리할 수 있다. 이를 블로흐E. Bullough는 심리적 거리psychical distance 개념으로 탈태시킨 바, 이성선의 ‘경작 심리’를 이 방향으로 음미하면 흥미로운 분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시의 발화자 말고 숨은 화자는 누구인가. 발화자는 그(=농부)지만 숨은 화자는 지은이 자신이 자명하다. ‘나’는 왜 그렇게 숨어 있기만 할까. 화자의 천성탓이다. ‘경작’은 그의 시작과정에 다름아니다. ‘농부’를 ‘시인’으로, ‘밭’을 ‘글밭’으로 바꿔보면 이해가 간단해진다. ‘밤내 껴안고 신음하던/마음의 밭뙈기를 꺼내/벌판에 펼쳐놓고/힘껏 갈아가는 농부//넘어지며 부서지며 농부는/밭을 간다’는 몸짓(행위)은 그가 단순 정신노동에 사로잡혀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만큼 시작 과정이 힘들었다. ‘찢긴 밭고랑에 핏빛으로 타는 놀//노을 속에 끝내 자기마저 갈아버리는/그의 뒷모습이/어둠에 잠기고 있다’며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 더욱이 그렇다. 그렇다, 이성선은 평생을 ‘일생으로 타는 놀’이 되도록 갈아대며 살아왔다. 그의 노동은 이처럼 겹겹이 정신적 격렬한(?) 땀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래도 그는, 거기 그렇게 그는 항상 있다, 있었다, 있을 것이다. 우주와 은밀히 내통하는 조용한 대화에 귀를 기울여 보자.
洛山寺 주지스님 방에는 파도만 치면 바다 울림으로 문고리가 떨린다. 하늘에 異變이 생겨 四天王 눈빛이 빛나고 圓通普殿 주춧돌에 번개가 내릴 때 스님이 잡은 비파 천년 잠든 현이 미친 듯 울며 깨어나, 바다를 부수고 세상을 부수고 하늘을 부수어 등 굽은 스님 절벽귀를 후려때린다. ― <異 變> 부분
저무는 들판에/소가/풀을 베어먹는다.//풀잎 끝/초승달을 베어먹는다.//물가에서 소는/놀란다./그가 먹은 달이/물 속 그의 뿔에 걸려 있다.//어둠 속에/뿔로 달을 받치고/하늘을 헤엄치고 있는 제 모습 보고/더 놀란다. ― <달을 먹은 소> 전문
전자는 시간의 초월성을, 후자는 사물·자아·자연의 일체감을 노래한 시로, 이 시인의 비교적 난해한 작품에 해당한다. 서로간의 <일체감>이 그 동위원소요, 나아가 ‘이물질끼리의 완전한 화해’로 감상해도 되리라. 경이로운 것은 고요의 대상들이 거의 역동성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그의 치밀한 의도다. 그런가 하면, 내면의 고통을 잔잔히 다스리는 시인의 가슴이 파문처럼 다가와, 읽는이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이 의미롭고 새뜻하다.
만남, 그리고 다시 만남 우린 곧장 고성 방향의 동명항東明港으로 간다. 송지호 해수욕장은 고니가 살 정도로 아직도 맑단다. 부두가 보이는 한 곳의 <동아횟집>. ☎ 33~5407, 김청호 씨가 그 주인이다. 썰렁, 아무도 없다. 쥔여자와 티비만 있다. 우리가 음식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한 사람의 손님도 찾지 않는다. 국제통화기금, ‘아예메프IMF 현상’이다. 우선 문학 교육의 위험성에 대해 의견을 터뜨린다. 시를 모르는 국어쪽 행정병(!)들이 시 문제를 내고 가르치는 게 진정 큰 문제라는 점에 서로간 동감이었다. 형이 나에게 고려원 시집 《벌레 시인》과 동화적 산문집 《시인을 꿈꾸는 아이》(율도국)를 건넨다. 나는 시집 《비밀번호》를 형에게 드린다. 산문집은 기간의 《밧줄》에 가필한 책이라고. 이 초간본을 형이 ’91년 스승의 날 때 내게 주었던가. 교사 5인이 모여 합동 씨리즈 시집을 발간하자 티비방송에서 인터뷰했었지. 그때의 전원출판사는 의욕이 대단했다. 오영호 사장과 전옥란 편집장도 참 패기만만했는데. 지금은 없어진 <전원>, 재판까지 박은 그 시집들은 어디 갔을까. 그때 우린 모였다. 합동출판기념회에 나가고, 티비에도 나가 한 시간씩이나 대담을 가진 우리는 시인 정대구·이성선·나태주·송수권·김강태 이렇게 5인이었다. 내가 이분들과 교류한다는 표현은 지나친 거고, 나를 제외한 나머지 분들은 지금도 활발한 지인관계를 유지한다고. 그때도 형은 조용했다. 나긋나긋 느릿느릿, 이랬다. 많이 촌스러웠다. 우린 이처럼 익숙치 못한 카메라 렌즈 앞에서 당황하다가 끝냈다. 땀방울이 송송, 나도 그랬다. 그런 형과 내가 지금 만나고 있다. 형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것처럼 보였다. 아니, 이 말은 원칙적으로 틀린다. 깊이나 넓이가 더 있어보였다면 외람된 말일까. 나의 서툰 인터뷰에 형의 잘 닦여진 세련미는 윤이 난다. 헌데 내가 모듬회 한 접시를 거의 혼자 씹는 동안 형의 말은 끝이 없었고, 마지막 물오징어 한 접시를 마저 끝내주는 동안에도 형은 언어의 열을 더했다. 얼굴 표면에 비해 싱싱한 게 말씀이라, 활어급活魚級 언어가 형의 낯에서 피아노음처럼 튄다. 쌩쌩, 나의 내벽으로 날아와 툭탁 놀고 있다. 곧이어 내 의식을 휘몰아치는 생생生生, 크작은 물고기 몇 마리. (순간, 날오징어 다리쪽이 목구녕에 걸렸다. 어쩐지 정신없이 밝히더니만. 요게 사뭇 곰질거린다. 안 듣고 먹기만 한 죄값이다.) 생태기 1941년 1월 2일, 이성선은 설악산 북쪽과 금강산 가장자리 남쪽 봉우리 사이, 신선봉 아랫마을 고성군 토성리 성대리 226번에서 출생한다. 아버지 李春三, 어머니 金月溶 사이의 2남 1녀중 장남. 산골에서 5Km 떨어진 바닷가 초등학교를 다닌다. 중학생 때도 그랬지만 고교 시절은 참담했다. 기관지 천식에 신경쇠약, 그리고 불면증에 시달렸다. 신경이 매우 예민한 때문이었다. 가정은 중농이지만, 그가 11살 때 독립기관인 양양 군보건소에 다니던 부친―그의 기억에 무섭고 엄격했던 아버지가 일사후퇴 이후 피난민 대열에 끼어 북으로 갔기에 모친은 자식들을 키우느라 심한 고생을 한다. 형은 국군 수색대원이 겨눈 카빈총구에 사시나무가 되는 모진 체험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에게 귀한 상상력을 심어준 분으로, 작은 문학 자전(<동양적 자연관>(시와시학사, 1996. 봄호)을 읽는 나는 갑자기 기분이 야릇해진다.
열한살 때였다. 어느 봄날 해가 지고 어둑할 무렵, 마흔의 아버지 뒤를 따라 동해 바닷가에서 험한 태백산맥 줄기 속에 숨은 마을 집을 향해 나는 가고 있었다. 아버지도 나도 아무 말없이. 이렇게 바다에서 한 3Km 정도에 이르러서였을까. 아무 말없이 냇가 옆의 둑을 따라 가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몸을 돌려 바다 쪽으로 손을 들어 가리키더니 나를 향해 놀란 듯 크게 말하신다./‘얘야, 저 달좀 보아라!’/크게 감동한 듯 무엇에 홀린 듯 서서 가리키는 아버지의 손끝을 따라 눈길을 주던 나는 실로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곳에는 이제 막 바다에서 떠오르는 달이 크고 둥글게 불타는 얼굴로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순간 나는 온몸이 화끈하는 전율에 휩싸이며 커다란 불덩이가 가슴 속으로 뜨겁게 안겨드는 느낌을 맞았다.
그의 시인됨은 아버지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형은 감읍한다. 생사를 모르는 부친 때문에 군사 정부에서 신원 조회 등으로 한동안 시달리기도 했지만, 바로 이 순간을 아들에게 주기 위해 아버지가 오셨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이것이 ‘자연과의 첫 만남이고 우주와의 첫 만남’이었다고 형은 실토한다. 속초중학에 입학하면서 왕복 70리의 학교를 집과 누님 집에서 다닌다. 친구도 없이 명문 속초고를 다니던 1학년 1학기 끝, 심성은 고왔지만 신경성 이상과 불면으로, 고2까지 이끈 담임교사의 배려에 의해 이성선은 시험만 대충 치른다. 자연스레 자연과 벗하는 시간이 많아졌지만 고2때까지는 진학이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속초는 외지인들로 가득한 곳, 근방 고성은 그의 고향이다. 건강이 애초 나쁘진 않았다. 마을에선 평행봉을 잘 하는 남학생이고, 고교 휴학 중에는 학교 못간 동기생들을 위해 야학도 참여한다. 다만 학교라는 메커니즘이 싫었다고. 이때 유일한 위안이 책이고 문학이었다. 책은 동네 서점에서 무료로 볼 수 있었다. 그가 지식을 채울 곳은 오로지 책방뿐이었다. 그 文界書店 주인은 아마튜어 바이얼리니스트였고 일찍이 깬 분으로, 총민·총명한 학생에 대해 관심이 각별했다. 어린 이성선은 카프카와 까뮈, 도스토예프스키 등을 읽는다. 낮에는 산과 들로, 밤에는 문학 작품을 탐독하면서. 중고대학 동기생인 연극인 서연호(현재 고대 국문과 교수)를 계속 만나지만 전공이 다른 그의 입은 이성선을 황홀케 하기에 충분했다. 중1때는 묘하게도 극작가 겸 국어 담당인 高東栗 선생(본명 양한석)의 가르침이 인연이 된다. 중3때는 백일장에서의 장원이 계기가 되면서 소설을 쓰기도 했다. 속초고 시절, 국어를 김송원 선생에게 배우면서 문학에 흠뻑 빠진다. 자신에게 직관력 있음을 알고는 한문학과 농업에 대해 매력을 갖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자신이 하고픈 문학과 거리가 먼 게 안타까웠다. 이때 같은 책상에서 만난 이반(본명 이명수/숭실대 교수·연극연출)도 삶의 귀한 동반자로 잊지 못한다. 그가 고대를 택한 건 오직 조지훈 시인 때문이었다. 모친의 반대로 농학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으나(원래 그의 꿈은 아인슈타인 같은 물리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2학년 때 전공을 접하곤 학과 선택이 잘못됐음을 자각하면서 깊은 회의에 빠진다. 세상에, 토양학·비료학이란 강좌에 원소기호가 눈 앞에서 맴돌다니! 그러나 멀리서 동탁 선생을 뵐 수 있어 좋았고 도강할 수 있어서 흐뭇했다. 지훈 선생은 자기 사람 안 만들기로 철저한 분이다. 지금도 하나의 감격으로 남아 있다. 이렇게 회상하는 형의 표정이 마치 ‘지훈 정신’ 바로 그 자체였다. 그는 혜화전문 출신의 이원섭 선생께 추천 받은 걸 상기도 잊지 못한다. 문학과 농학 사이에서 번민도 많았지만, 농학과 은사인 趙載英 교수 또한 잊을 수 없다. 그 분은 대학생 이성선을 참 아껴주셨다. 그러나 전공으로 번민하던 이성선은 ROTC 3기로 들어갈까 하다가 복학을 전제조건으로 학보병 00군번을 택해 1년 6개월동안 군 복무를 한다. 당시의 4월 학제에서 2학년 1학기를 다니다가 간 군대였다. 물론 최전방(철원 지역 노동당청사 부근) 전투병과였다. 복학하지 않으면 재입대가 되므로 제대하면서 다시 대학을 다닌다. 은연중, 농학이 문학적 개성을 키우는 데 큰 역할을 해준 걸 깨닫기도. 독창적 문학세계 형성에 이로움을 주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사이 작품을 들고 목월 시인을 찾아가 보이자, 선생에게 박남수의 <새>를 모방했다는 꾸지람을 듣고 그만 경악한다. 사실 그때까지도 시인 박남수를 잘 몰랐고 <새>를 접한 기억도 전혀 없었다. 충격에 한동안 절필한다. 재학 시절 등단을 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졸업을 몇 달 남긴 채 농촌진흥청이 실시한 ‘4급 을乙(현 7급)’ 농업연구직 국가공무원 시험에 합격한다. 그리곤 졸업과 동시에 작물시험장에서 콩을 연구, 약 10개월을 근무하게 된다. 그에게 콩 연구는 한때 흥미를 주었다. 어느새 그는 204품종 콩의 생태학을 연구하는 <콩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시험장 장장場長의 ‘학자가 되려면 보리 자라는 소리를 들을 즐 알아야 한다’는 말에 깜짝 놀란다. 그분이 식물과의 대화법을 얘기한 것이다! 그러나 문학에 대한 염원 때문에 도저히 시험장 생활을 할 수 없어 일부러 나온 그는 결국 방황하고 만다. 당시 신구전문대가 설립되면서 교수로 갈 기회도 있었으나 역시 매몰차게 거절한다. 농업교수는 정말 싫었다. 趙 교수님은 속초까지 내려와 설득했지만 그는 스승의 은혜를 저버린다. ’60년대가 기우는 어느 늦가을이었다. 그러나 이 고마움을 평생 잊지 못한다. 아름다운 배신, 당신을 보내 드리면서 마음이 너무 아펐다. 1961년(21세)에는 現代文學에 <9월>이란 시를 냈지만 김현승 시인의 아쉬운 낙선 선후평과 함께 실패하는 경험도 한다. ’60년대의 모더니즘 바람은 거셌으나 이성선에게는 불편한 조류이기만 했다. 그들 대부분은 현재 포스트모더니즘에 젖어 있다…. 문학이냐, 고향 지키기냐. 이것은 이성선에게 큰 고민거리였다. 결국 1969년에 가서야 속초에서 문학 활동을 하는 기쁨을 맛본다. 농업은 생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학문이라 한다. 거듭 얘기하지만, 형이 깊이 연구한 농학이 시작 생활에 큰 도움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작품에 빈번히 나타나는 식물적 상상력은 우연한 산물이 아니다. 그로부터 형은 스스로 소외의식을 만든다. 시집 《밧줄》에서의 ‘밧줄’은 형에게 ‘탈옥脫獄의 이미지’로 작용하고 있다. 1970~현재, 속초 양양 고성에서 농업·실업 담당의 교사 생활. 1971·초등학교 교사 崔英淑과 결혼. 1972·장남 지현 출생, 현재 S대 국제경제학과를 나와서 S그룹에 근무중임. 1974·찬현 출생, K대 무역학과를 졸업, ROTC로 임관하여 현재 서부전선에서 복무중이다. 1986~1989·고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다니며 국어교사 자격증을 취득. 어머니 별세.
문학 연보 ·1969 속초에서 문학동인 <설악문우회> 결성 ·1970 《문화비평》에 <詩人의 屛風>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1972 《現代文學》 자매지 《詩文學》에 첫번째 재추천(김상옥/이원섭) ·1974 제1시집 《시인의 병풍》(현대문학사) ·1977 제2시집(연작장시집) 《하늘門을 두드리며》(전예원)·1979 제3시집 《몸은 지상에 묶여도》(시인사) ·1981 <물소리 시낭송회> 개최. 최명길/이상국/고형렬 등과 함께 진행하며 지금까지 약 140여회 개최·1982 제4시집(산문장시집) 《밧줄》(창원사) ·1986 제5시집 《나의 나무가 너의 나무에게》(오상사) ·1987 제6시집 《별이 비치는 지붕》(전예원) 4인시집(김달진/조정권/최동호/이성선) 《샘물 속의 바다가》(문학사상사) ·1988 제7시집 《별까지 가면 된다》(고려원)/강원문화상 문학부문 수상·1989 제8시집 《새벽 꽃향기》(문학사상사) ·1990 시집 《새벽 꽃향기》로 제22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연작장시 <山詩> 40편을 《現代詩學》에 연재 4인시집(이수익/조정권/최동호/이성선) 《시간의 샘물》(나남)·1991 제9시집 《향기나는 밤》(‘우리선생님 시집’/전원) 제10시집 《절정의 노래》(창작과비평사) 시선집 《빈 산이 젖고 있다》(미래사) ·1992 4인시집(이수익/조정권/최동호/이성선) 《지상에는 진눈깨비 노래가》(민음사) ·1994 제11시집 《벌레 시인》(고려원)/제6회 정지용문학상 수상·1996 제1회 시와시학상 수상 ·1997 개작 산문장시집(《밧줄》) 《시인을 꿈꾸는 아이》(율도국) 정신주의란 무엇인가 <정신주의>는 우리들(엄밀히 말해 이성선 시인)에게 큰 주제였다. 대화의 반 이상이 정신주의였다. 한 마디로 그의 지론은 ‘정신주의란 서정과의 만남이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형이 생각하는 서정의 반개념이 궁금해서 좀더 자세히 얘기해 달라고 주문했다. 정신주의를 말할 때, 세인들이 지고한 정신성만 운운하는데 그 점은 반성해볼 문제라고 부기한다. 우주세계율이니 관념적 세계 등에 대해 얘기하지만, 어쩐지 나는 형이 운위하는 내용들이 성에 차지 않았다. ‘형은 그냥 시만 쓰면 돼!’라는 고지식한 사고 때문이었다. 형의 작품은 서정의 안에 ‘따스함’이 숨어 있다. 나는 좀 캥겼지만, 형의 시는 ‘따스함’이 매력이라고 말했다. 우린 기인 대화로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동명항은 그렇게 어두워갔다. 그는 식물의 교배작용에서도 관념적 세계를, 우주적 세계율을 적용시킨다. ‘달걀은 21일만에 깨어나지요. 소가 발정하며 암내를 풍기는 것도 21일만의 생리주기에 기인합니다. 예외는 있지만, 대개 큰 동물은 28일이 발정주긴데 인간도 이에 해당하는군요. ‘들떠있다’가 ‘달떠있다’란 말에서 전해졌다는데, 아마도 보름달만 보면 흥분을 느끼는 사람과 동물의 심리상태를 주기적으로 관찰한 보고서도 있는 만큼, 이는 참 재미있는 사롄가 해요. 꽃들의 암술과 수술의 교배작용도 사람의 섹스와 다를 바 없지요.’ 형의 말을 듣다 보면, 나무가 공기고 사람이 나무고 흙이 풀이며 풀이 사람이다…. 저들의 총체성이 하나의 거대한 우주율로 질서롭게 시인을 감싸고 압도하기도 한단다. 그래서 인도로 배낭여행을 두 번이나 다녀왔다. 사념의 세계를 한없이 펼 수 있는, 이성선 시인에게는 아주 좋은 체험이었으므로. 이번 겨울도 계획했지만, 아쉽게도 나라의 외화 사정으로 그만둔다. 아울러 우린 인도 여행을 꿈꾼다. 그가 배낭 여행에서 본 인도는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스스로 높을까’의 끝없는 의문의 세계였다. 진정한 삶의 의미 찾기를 그곳에서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이를 <현존재現存在에서 내존재來存在까지>라고 명명한 뒤 그 다음에 이을 언어를 준비한다. 마땅치 않다. 한 가지, 형이 생각하는 내세는 정신성의 세계, 그 떨림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같았다. …이 <떨림>에 대해 김훈이 얘기했던가. 악기·선율·떨림의 조율에 대해 이랬지, ‘떨림’의 정체는 ‘두려움과 흔들림’이라고. 그래서 이성선 형은 황홀한 언어를 새겼는지? ‘시는 내가 쓴 것이 아니라 하늘의 말을 받아 적은 것’이라고. 하늘의 말을 듣는 시인의 귀를 훔쳐 보는 이 마음…. 한편, 이숭원은 <생명의 근원으로 가는 길>(《시와시학》, 1996. 봄호) 제하에서 이성선의 시를 ‘고요’와 ‘존재의 비밀’, ‘황홀감과 떨림’ 등으로 엮으면서 특별히 두 가지 시적 가치를 정리, 독자들에게 제공해주고 있다. 1) 그가 유일의 시적 대상으로 삼고 있는 자연 공간이, 영혼이 깃든 맑고 고요한 자리를 보장해준다는 점. 2) 그의 작품이 자연을 통하여 자아의 반성적 태도를 보인다는 점. 나무들도 생각이 많아요
나는 그의 시구를 듣는 듯이―많이 들어본 말인데도―기뻤다. 그는 늘 나무 생각에 젖는다. 나무들을 연민한다. 이윽고 시인은 나무가 되고 싶다. 나무가 ‘나는 이성선’이라고 화답한다. 그렇지, 나무는 우선 수직성을 갖는다. 나무가 뿌리 내릴 때는 반드시 지평과 만난다. 지평은 가로선상인데, 이를 십자가로 발전시킨 그리이스 신화는 본디 구원을 상징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인간이 사지를 비틀어 만든 분재를 매우 아프게 바라본다. 저들 몸의 비틀림을 서러워 한다. 오비드의 <변신>을 보면 인간을 나무로 많이 변신시키는 장면이 나오고, 나무를 성자로 보는 보들레르의 심리 등이 이성선의 시정신과 매우 흡사하다고 생각된다. 이성선은 말한다. 나무는 연구 결과에 의하면 바하를 좋아하지만, 실은 인도 음악을 더욱 좋아한다고. 그는 나무에게서 영원한 생명성을 느낀다. 자료를 펼쳐보니 현대 남북 인도의 고전 음악을 논할 때의 라가raga는 음악이 아니라 이론용어다. 주로 열렬한 애정·욕망·기쁨 등을 추구하는데 이 라가raga를 터득한 연주자는 정감·색상·분위기 등의 포괄적 심리 표현을 해낸다고 기술되어 있다. 물. 이어서 이성선은 물을 말한다. 융의 <집단무의식>처럼, 물은 모든 것을 두루 통한다고 자기 입술에 힘준다. 이는 원효의 깨달음이라는 설명도 따른다. 물이란 고여있지 않는 역동성을 가져서 부분과 전체가 같으니, 그렇다면 전체가 흐름이고 생즉몰生卽歿이며 무두무미無頭無尾이겠구나. 그래선지 이성선의 작품은 한결같이 인간의 교만함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그의 성격은 때로 물같고 때로 산같다. 물의 흐름처럼 마음의 산세도 유려한 듯. 사상은 정신주의의 우위성을 확연히 강조하는 데서 강인함이 나타난다. 형의 정신주의 출발은 최동호의 의견과 동일하다. 만해와 조지훈, 매천과 육사, 석정과 김달진, 윤동주에서 김현승, 김수영·김지하·황동규(황동규도 이 영역에 넣을 수 있을까), 이용악·신경림 등으로 이어지는 내용에 별로 이의는 없지만, 다만 이들을 빼고 볼 때 우리 시단의 <이즘>이 온통 정신주의를 골간으로 이어왔다고 정리되는 마당에, 이 가름은 다소 위험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실상 노장·은둔과 종교적 정신주의, 초월주의, 토속적 전통주의 등의 용어는 전통적으로 우리 시단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말이 아닐까. 이런 계보를 뺀다면 어느 저명한 시인이 남을 것이며, 동양정신만이 우리 시단을 지배해왔다는 식의 주장도 일부 억지가 있는건 아닐까. 그럼에도 이성선이 말하는 다음의, 정신주의 개념(《문학사상》 1996. 12월호)은 설득력을 지닌다. 너무 폭넓은 문학사 영역을 포괄주의로 처리한 시각이 안이해 뵈지만, 형은 역시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새로운 것으로 다시 새로운 것으로, 새로운 빛깔과 새로운 향기’만 지향해 온 우리 시단의 실상을 몹시 안타까워 한다.
정신주의 주요 명제는 정태적인 것을 부정하고 역동적인 것을 지향하며, 전통적인 것은 옹호하지만 보수적 고착성은 타파한다. 또 세속성을 거부하면서 현실의 건실한 토대 위에 새로운 각성으로 굳세게 서는 시학의 수립을 요구한다. 아울러 신성함의 추구와 인간 존재의 고귀함을 높이고 감싸는, 향기 짙게 배인 모든 시적 세계의 성취를 말한다 하겠다.
그는 이제 침묵키로 한다. 시쓰기란 ‘우주율과 하나가 되는 것/침묵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신념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지워진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첨기한다. 계속해서 우주와 게임을 한다. 머언 우주가 언어로 다가온다. 이러한 새로운 관념론에 몰두하며 다시 우주로 귀향하려 한다. 이성선이 말하는 우주는 그가 ‘귀향(귀양)’한 땅 설악이고 금강金剛이며 속초다, 속초의 구물구물한 날오징어 내장 자체다―. 여기서 정신주의를 논한 부산대 김준오에게 나는 매우 끌린다. 정신주의 시란 ‘비움’의 세계이며 진정한 어조와 신성함과 경건함의 감각을 회복한다, 서정성 회복과 화해와 긍정의 시각을 회복하여 사고의 경직성을 극복하는 시롤 의미한다는 내용이 안정 논리로 수용된다. 그러나 이성선의 시인적 면모가 나타나는 구절은 ‘인간의 따뜻함과 본성을 지키는 시쓰기’ 대목이다. 나는 형의 이 ‘따스함’에 애정을 느낀다. 이 ‘따스함’이 이성선 시의 궁극적 지향점이 되기 바란다고 기도한다. 형에 의하면, 따스함이란 당연히 ‘정신적 긴장과 탄력을 불어넣어 역동성을 가하는’ 노력으로 서정성을 회복하는 일이며, 정신주의가 우리의 ‘자생적 시관’이라는 맥락도 이해를 돕게 한다. 그래도 의문은 생긴다. ‘시에서 정신성의 영역을 단순한 <이즘>에 묶을 수 있을까’. 이래서 나는 여전히 일말의 불안을 느끼고 있다. 과연 비정신주의는 무엇이며, 어떤 작품들이 비정신주의 시인가! 명명백백히 풀어볼 의문부호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96년 ‘정신주의/해체주의’ 논쟁은 일종의 소모전이 아니었나 싶다. 뒤따른 쟁론이 없으므로. 동서양 사고방식의 차이를 감안한다 해도, 조심스레 나는 <정신주의>를 ‘총론’에, <해체주의>를 ‘각론’에 위치시켜 판단해주기를 희망하고 있다.
지훈·미당, 그리고 이원섭 시인 지훈·미당·이원섭 시인이 그의 존경 대상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를 발탁한 분은 조연현 선생이었다. 윤재근 씨의 《문화비평》에 황금찬 시인이 소개하여 등단하기 직전, 그는 신춘문예로 데뷔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아이러니 하나가 발견된다. ‘70년 ??일보 신춘문예 최종심. 미당·김종길·박남수 시인 중에서 미당이 그의 시를 밀었으나 같은 고대의 김종길 시인에 의해 좌절된 것이다. 그러면서 형은 ‘왠지 동국대와 인연이 많다’며 웃는다. 형은 환경에도 각별한 관심을 쏟는다. 자연관의 자연스런 귀결이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의상·원효의 화엄학을 들먹거리는 형이 초월주의자가 아닐까, 생각했다. 행동적 초월주의? 어느 인터뷰어 한명희 시인과의 대화에서, 자신을 ‘리얼리즘도 모더니즘도 아닌 동양적 자연관’을 추구하는 시인으로 규정한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띤다. 형의 시가 곧잘 비현실성을 지적받지만, ‘삶 자체가 현실감이 없다’고 받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그때 한명희는 중얼거렸다, ‘외로움이 굳고 굳으면 이렇게 보석처럼 투명해지는 걸까’라고. 양희은이 부른 노래 중에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란 구절이 기억난다. 외롭다, 외롭다고? 그렇구나. 형은 지금 내 앞에서 외로움을 물오징어에 비벼댄다. 초고추장도 칠한다. 조갯국물도 들이킨다. 형이 또 중얼거린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본질>을 생각하라. 어휴, 어렵고 어렵다! 아무튼 그의 태생적 외로움은 씻을 길이 없다. 시 <외로운 사랑>(전문)을 소리내어 읽어보자.
나는 다른 시인이 될 수 없음을 안다. 풀잎과 마주앉아서 서로 마음 비추고 남들은 들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로 함께 꿈꾸며 별을 바라 밤을 지새는 시인이면 족하여라. 그것만으로 세상을 사랑한다. 그와 내가 둘이서 눈동자와 귀를 서로의 가슴에 묻고 사랑의 뿌리까지 영롱히 빛내며 저 하늘 우주의 울림을 들으면 된다. 세상의 신비를 들으면 된다. 그의 떨림으로 나의 존재가 떨리는 그의 눈빛 속에 내가 꽃 피어나는 그것밖에는 더 소용이 없다. 그렇게 별까지 가면 된다.
이 시는 신에 대한 시인의 영혼의 자기 고백투 작품으로, 평자들은 우주율이란 질서를 담고 있다고들 말한다. 이성선의 작품 대개가 그렇듯이 이 시도 굳이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음미하면 된다. 그는 순 자연산 시인이다. ‘풀잎과 마주앉아서 서로 마음 비추고’ ‘사랑의 뿌리까지 영롱히 빛내며/저 하늘 우주의 울림’과 ‘세상의 신비를’ 그저 듣기만 하면 된다. 중요한 곳은 마지막 시구다. ‘그의 떨림으로 나의 존재가 떨리는/그의 눈빛 속에 내가 꽃 피어나는’ ‘그렇게 별까지 가면 된다’는 자기 깨달음이 귀하다. 그러나 형은 관념적 정신주의에 맥없이 사로잡히진 않는다. 관념의 허구성에 대해 그가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그에겐 땀 냄새도 난다. 이 작품은 평자들에 의해 ‘풀’은 자연적 친화와 교감의 대상으로, ‘별’은 다이나믹한 ‘낙하의 상상력’으로 비유되었다. 이 정태情態와 동태動態의 기막힌 비교 및 대조를 보라. 이 양자 사이에서 시인은 ‘고독’이란 원초적 부산물도 빚는다. 대화를 끊으며 그는 문단후배들에게 간곡히 알린다. 정말 문학을 사랑해 주었으면, 문학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택해달라고. 마치 후배시인이라는 ‘풀잎’을 면전에 놔두고 ‘풀잎과 (마주)앉아’ 지긋한 눈매로 속삭이는 듯한 다음 작품을 감상해 보자. 참으로 성스럽다.
풀잎과 마주앉아/우주와 앉아/마음을 모은다./산이 춤추며 온다./바다가 말하러 온다./산 노래에 몸을 싣고/꽃의 눈동자 이슬에/뼈를 씻고 바라보면/다시 깨어 보면/세상 속에 세상은 없다./거기 나는 없다./시간과 공간의 이 큰/천둥 번개가 모두 나의 집/나의 몸이다./풀잎과 앉아/별 속에 나비로 날아/이 우주 이 무궁/삶은 신비다./세상 전체가 향기다. ― <풀잎과 앉아> 전문
이 작품은 ‘산뽕잎을 흰 누에들이 먹고 있다.//구름 풀어지는 설악산’이라고 노래한 <누에>(전문)나 <오세암>행行과도 통한다. 늘 흰빛을 띤 설악이나 오세암은 형이 궁극적으로 올라가고픈 조정권의 <산정묘지>일지도 모른다. ‘내설악에서 밤에/우주 전체가/계속 물 속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것을/보았다.//길을 따라 들어간다.//아무리 찾아도/절이 없다’는 데서 시詩가 ‘언어의 절(言+寺)’이라는 인식을 새롭게 다지고 있다. 다음의 <저녁산을 바라보며>(부분)는 이미 정신의 높이를 드러낸 시다. 고결하다.
어제는 산사의 마당에서 제 그림자를 쓸어내고 있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오늘 저녁은 다시 잎 다 떨어진 나무 아래서 제 그림자가 큰 나무의 그림자가 되기를 기다리는 사람을 하나 만났습니다.
부연 설명의 필요성이 귀찮다. 앞뒷연의 ‘사람’은 시인 자신이 확실해 보인다. 나는 과연 ‘제 그림자’ 하나 발견하고 있는 걸까. 난 언제나 형처럼 ‘잎 다 떨어진 나무 아래서/제 그림자가/큰 나무의 그림자가 되기를/기다리는 사람을 하나’ 만날꺼라고 노래할까나. ‘우주의 숨쉬는 자궁//그 속에 당신의 정액이/별들로 희부옇게 뿌려져 있다.//바가지 하나 가득/우물물을 뜬다.//사리빛 당신의 몸을 마신다’는 시 <우물>(전문)에서 ‘사리빛 당신의 몸’이 참으로 광휘롭다. 씁쓸히 형과 헤어지고 난 뒤, 나는 대화 내용을 대충 정리했다. ‘이성선은 싱겁다’라고 적는다. ‘싱거운 이성선’이라 다시 쓰고 끝에다가 느낌표를 하나 찍는다. 겉은 그렇지만 속은 잘 모르겠다. 형은 아무래도(역시나) 선생님이구려. 시 얘기 외엔 꼭 막혔다(!). 나는 4인 시집 발간 멤버(이성선·이수익·최동호)인 조정권 시인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만다. 다소 안면 있는 그에게 성선 형의 일화를 몇가지 듣고 싶었던 거다. 뭔가 부족해 보여서다. 그러면 뭘 하나, 나나 조정권 형이나 따지고 보면 모두 아웃사이던데. 나도 참 싱거워라. 해수기침 섞인 웃음으로 나는 쿨쿨, 웃는다. 먹을 때 행복하여 졸음이 담긴 눈빛처럼. 이윽고 잠을 청한다. 모자란 잠인데도 아니 오는구나. 산이 숨을 쉬어서? 아까 본 설악 산정의 설빙 탓으로? 아까 넘어온 진부령의 설산 풍경때문? 아니다. 산이 아니라 동해가 숨을 쉬고 있다. 동해가 지금 생生 이방인인 강태를 유혹하고 있다. 설악산 앞에 선 형에겐 ‘큰 노래’도 있다. ‘아, 설악산 나무/나는 너를 본 일이 없다./전신이 거문고로 통곡하는/너의 번뇌를 들은 바 없다./밤에 길을 떠나 우주 어느 분을/만나고 돌아오는지 본 일이 없다’는 호방한 노래 말이다. 노래로 우주를 논하는 그가 부럽다. 동명항 부두로 다시 나간다. 10호 삼성상회, ☎ 0392)635~0510/32~8228 (‘정아엄마자택’이란 명칭이 이상하다), 동명동 활어 직매장 한쪽에 앉는다. 이 점포들은 오돌도돌 모여서, 칸만 막았지 한 집이나 마찬가지다. 저만치 등대가 보였다. 한쪽으로 닻을 드리운 어선들이 마치 한 우물같다. 밧줄을 만지다가 배에서 내리는 어부에게 묻는다. 아저씨, 요샌 뭐가 잘 잡혀요?―문어요. 건조한 방파제가 마른 쓸쓸함으로 서있다. 나는 다시 세꼬시와 물오징어를 물어뜯고 명주조개를 불에 굽는다. 옆 가게 77호 아줌마가 10호집 아줌마 없을 때, 슬쩍 ‘자연산 광언데 3만원에 잡술래?’ 한다. ‘잡수다’란 존칭어를 변형시킨 ‘잡술─래?’가 재밌다. 이 결합을 문법학자들은 뭐라고 명명할 건가. 난 이때부터 아줌마에게 말주정을 부리면서 엉기듯 말끝에 ‘─래?’를 붙인다, 하릴없이. 저 끝으로 곧 우람한 해와 달이 꿈틀거리는 듯. 와와, 새해다! 다시 시작하는 말 시인 이성선은 보다 한긋 정신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형의 마음밭은 온통 그곳에 가 있다. 그는 육신의 움직임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글쎄, 내가 보기로는 땀에 흠뻑 젖은 육체 노동에서 핵심의 정신이 노오랗게 고름맺힌 양 썽나 있어야 진짜일 텐데. 어쩐지 형의 고름은 참 독할 것 같다. 그러나 점점 노장老莊의 색채 의혹이 짙어간다. 쉼표 하나만 휑덩그러이 만들어놓고 이승을 그냥 떠나진 않을 테지. 암, 이성선 형이 누구처럼 선시 쓰는 신선으로 전락해선 안 되지, 안 돼. 손쉽게 승천하고 말 테니까. (1998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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