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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버스토리 / 노향림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을 위하여

- 노향림의 ‘지친 그리움’ 읽기

 

 

 

김강태

 

 

 

끈처럼 슬그머니

나는 대형문고 K에 들른다. 새로 나온 노향림·천양희 시집과 이형기 시집을 구입하기 위해 슬렁슬렁 신간 시집 코너로 간다. 다른 매장에 비해 시집 코너는 참 소슬해. 그분들로부터 시집을 다 선물(기증) 받았지만, 지나는 길에 고마움으로 1부씩 더 산다. 투병중인 시인―깔끔한 얼굴로 ‘이형기 얼굴’이 웃는다. ‘노향림·천양희 얼굴’도 웃는다. 그녀들은 병 앓고 마음을 몹시 앓는 시인들. ‘잘 나가요?’란 물음에 매장 아가씨가 웃는다. 눈 초롱, 하얀 이가 예쁘다. 나의 눈에 확 익는 시 <봄비 1/2>를 서서 다시 읽는다. 좀 더 가까이 그녀에게로 다가간다.   

 

지난 겨울 누우드로 버티어온 나무들이 유심히 제 몸을 들여다본다. 수없이 많이 튼 살갗을 아프게 때리는 빗줄기. 한때 농익은 열매 매달고 놀던 無性생식의 까만 젖꼭지를 퉁겨 본다. 어디서 보았을까. 몇 채의 집들이 들판에서 등 돌려 앉는 것을. 쑥대머리들이 귀를 쫑긋거리고 키를 늘인다. 온종일 속옷이 벗겨진 하늘에선 미처 피하지 못한 바람들만 산발한 채 뛰어다닌다.

 

스스로 물소리를 만들며/흘러가는 비, 비.  

― <봄비 1> 전문

 

그녀를 만난 시각은 오후였다. L백화점 <페닌쉴라> 양식부. 둥근 코너에 향림은 무언가를 열심히 메모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부터 여자 향림과 데이트할 거다, 그녀가 큰 눈, 큰 얼굴로 웃는다. 머리칼이 따라 웃고 나도 웃는다. 나는 그녀의 얼굴 어딘가에 ‘수없이 많이 튼 살갗을 아프게 때리는 빗줄기’가 묻어있는가(<봄비 1>)를 살펴보았다. ‘채 녹지 않은 꿈이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끌려나온 흔적’이 어디에 있는가(<봄비 2>)도 찾아보았다. 세월의 빗금이 잔잔히 그어져 있구나, 저어기 저 얼굴에. 그런데 그녀가 말을 아낀다. 조금 전의 전화 목소리와는 사뭇 다르다. 그녀는 늘상 ‘끈처럼 슬그머니 빠지고 싶어’ 한다.  

 

빠르게 흐르는 빗줄기. 라일락이 밥알 같은 꽃을 매단 주위는 온통 환했다. 묵은 김칫독을 들어낸 구덩이에는 겨울의 긴 뿌리가 언 채로 드러났다. 채 녹지 않은 꿈이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끌려나온 흔적. 이름 없는 나무들의 저 빈 가지 끝 숱한 얼굴 속 어디에 단발머리 중학생 시절의 내가 있는지. 사진첩을 펼친 듯 봄밤이 환히 어두워져온다.

― <봄비 2> 전문  

 

노향림의 <봄비 1/2>를, 평론가 이숭원은 ‘신생과 부활의 이미지가 아니라 자책과 회한의 의미로 제시되어 있다’고 단적으로 풀이(<시집 해설>, 113쪽)하면서 ‘아쉬움’과 ‘추억’의 시라고 정리한다. 이렇듯이 이 작품(들)은 성장한 화자(話者)가 어린 시절을 돌이켜 생각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시의 화자 의식을 따라갈 필요가 있겠다.

나는 이숭원이 말한 ‘추억’의 몸뚱이에 진한 희망이란 빵을 구어 바른다. 이스트는 적당한가, 그럼으로써 부풀기는 알맞은가. 그의 아쉬움과 추억은 살 저며내기를 적절히 하고 있는가…. 시인은 처음부터 ‘지난 겨울 누우드로 버티어온 나무들이 유심히 제 몸을 들여다본다’고 진술한다. 여기서 ‘나무’를 시인(시적 화자)을 뜻한다고 보면 이 시는 우리에게 도발적인 흥미를 제공한다고 하겠다. 시기는 봄, 다시 오는 봄이지만, 지난 겨울은 시인에게 매우 외롭고 괴로웠던 시절이라고 밝힌다. 그래서 시인은 ‘수없이 많이 튼 살갗을 아프게 때리는 빗줄기’로 자신의 지나온 삶을 표현하면서, 현재적 삶에서 과거를 줄곧 반추하는 인상을 풍긴다. 비록 나무를 빗댄 용어지만, ‘한때 농익은 열매 매달고 놀던 無性생식의 까만 젖꼭지를 퉁겨’ 보는 화자의 행위가 퍽이나 비상한 감각이다. 열매의 젖꼭지란 의미도 새롭다. 이건 열매가 떨어진 자리를 뜻한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젖 이미지’가 떠올라 감미롭고 에로틱하다.) 시인의 나이가 이런가, 벌써 이렇게 됐는가…. ‘몇 채의 집들이 들판에서 등 돌려 앉는’다거나, ‘쑥대머리들이 귀를 쫑긋거리고 키를 늘’이는 행위, 그리고 ‘속옷(이) 벗겨진 하늘에선’ 바람들만 산발한 채 뛰어다’니는 표현은 모두 ‘어디서 보았을까’로 수렴된다. 화자의 어린 과거를 회상시키는 과정에서 닿지 못하는 그리움의 시적 대상들인 셈이다. 어린 시절, 가까운 추억물인 이들이 다소 먼 위치로 돌아서 있다는 뜻이지만, 거기엔 그리움이 한껏 묻어 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시는 1연을 두 개의 의미연(意味聯=내용단락)으로 엮을 수 있겠다. 사실 시인의 의도대로라면, 1연은 분명히 2개의 형식단락(연)으로 나누어야 알맞다. 비는 추억처럼 ‘흘러’간다, 이때의 ‘비’ 속에는, 그러나 ‘추억 씻어내기’와 다름아닌, 그래서 시인의 망설임이 수정처럼 안타깝게 박혀 있다.

김이 나는 따뜻한 비에 젖는 가슴, 추억어린 빈 가슴.    

<봄비 2>는 <봄비 1>의 연속이다. 차라리 두 작품을 한 작품으로 묶었다면 어땠을까. 시적 화자의 현재는 봄이다. 라일락이 피어 환할 때, 시인은 ‘묵은 김칫독을 들어낸 구덩이에는 겨울의 긴 뿌리가 언 채로 드러났다’면서, 이를 ‘채 녹지 않은 꿈이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끌려나온 흔적’이라고 풀어준다. ‘겨울의 긴 뿌리’에서는 일종의 허망함이 보이지만, ‘채 녹지 않은 꿈’이란 다름 아닌 시적 화자의 어린 시절의 꿈이 아닐까. 말하자면 어린 기억이 ‘흔적’만 남아 있음을, ‘묵은 김칫독을 들어낸 (현실의) 구덩이’에서 ‘흔적’으로나마 발견하(려)는 시인의 조바심이 안쓰럽다. 자꾸 새기고 싶은 부분은, ‘이름 없는 나무들의 저 빈 가지 끝 숱한 얼굴 속 어디에 단발머리 중학생 시절의 내가 있는지. 사진첩을 펼친 듯 봄밤이 환히 어두워져온다’는 결구다. 시인은 어느새 그리움의 실제 대상을 찾아간다. 그것은 ‘숱한 얼굴 속 (어딘가에 있는) 단발머리 중학생 시절의’ 나다. 그러나 돌이킬 수는 없는 것이기에, 회상은 ‘빠르게 흐르는 빗줄기’로 잠시 머물렀다가 금세 지워진다, 흘러간다. ‘환히 어두워져’라는 시구는 일견 오기(誤記) 같지만, ‘환히’는 ‘추억이 새롭다’ 정도로 새길 수 있겠다. 향림 시인의, 어린 추억이 아프고 그리움이 서럽게 다가온다.

 

시인 노향림 생각

그녀는 전남 해남 산이면에서 1942년 6남매의 막내딸로 태어난다. 태어나자마자 목포로 나와 살게 된다. 목포시 산정동 산기슭에 딱 한 채가 남은 일인(日人)들의 ‘적산가옥’에서 가난한 유년기를 보낸다. ‘40년대의 유년은 해방 혼란기와 더불어 먹고 살기에 너무 힘든 시절이었다. 식구들이 모두 나가 돈을 벌거나, 먹는 물이 부족해서 물을 길러 가거나 오빠들이 학교 가면 혼자서 집을 지키기도 했다. 몸이 약해, 병은 이미 혼자 다 거친 것 같다. 어린 시절, 유행병이 창궐하던 때 장티푸스·복막염을 앓고 집에서 거의 누워 보낸다. 병들고 쓸쓸한 유년이었지만, 산기슭을 거쳐 뵈는 앞바다, 그 곳에 앉아 있는 섬 압해도가 무한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결국 그 섬과 혼자서 많은 대화를 나눈 셈인데, 이유는 대낮의 정적이 어린 마음에 무섭고 싫어서였다. 아마 이때부터 어떤 침묵하는 사물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할까.

바닷가가 고향이란 숙명적 공간에서 감지한 오랜 느낌은 어린 시절부터 세밀한 감수성으로 형성된다. 그 자잘한 일상에 대해 애정을 쏟아부은 탓으로 시인적 감성이 비롯한 건 아닐까. 예를 들면, 가족 모두가 문학적 분위기를 풍겼다고 한다. (그녀의 친정 부모는 장수 누리며, 세상을 누비고 즐기다가 돌아가셨다.) 중앙고보 출신인 아버지는 선비이자 한량이었는데, 일어판 《이방인》 《페스트》 등을 옆구리에 끼고 있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레코드도 많았다. 콜롬비아사·빅타레코드사(?)의 로고logo도 떠오른다는 향림. 그녀는 낡은 유성기 소리도 기억해냈다. 그 음악소리에 이해 못할 표정을 짓던 아버지가 그립다. 당신은 항상 어딘가로 떠날 채비만 했던 것 같다. (아버지!) 끼니는 굶어도 책을 산다는 것이 아버지의 생활 신조였다. 실제로 가족들 끼니를 망각하고도 시조 창(時調唱)·바이올린 연주·연극을 한다고 역마살 환자처럼 쏘다닌 아버지. 그것도 당시 백구두에 하얀 정장 차림의 신세대 남자. 날마다 일기를 쓰고 시를 쓴 문학청년이기도 했다. 그 아버지가 이따금씩 집에 들렀지만, 책을 ‘몇 꾸러미’씩 사 가지고 와서 향림에게 읽히다. 그래선지 중학교 때 막연히 문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다. 가정을 내팽겨쳤으므로 생활력이 강한 어머니가 대부분의 생활을 꾸려나가신다. 당신의 향학열은 대단했다. 소설가를 꿈꾸는 친정 오빠들이 와세다대학을 나올 정도로. (한 오빠는 케네디 대통령이 총탄에 맞아 죽는 기사를 읽자마자 와락,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 그의 감성은 뜨거웠다.) 많이 배우진 못했지만, 친정이 독립군 출신인 어머닌, 교회를 통해 신학문을 접했다. 밤샘으로 독서하기 일쑤였다. 이만큼 향림은 산정동 기슭의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 충격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죽음/주검을 가까이 보고 느끼며 자란다. 이상히도 시신을 실은 수레 같은 것이 그 산정동 집 창문 옆으로 지나가곤 했다. 목포 앞 바다로 수장시키려는 장의 행렬이었다.        

향림은 목포에서의 유년기를 끝내고 광주로 올라간다. 여중 1학년 때는 배우 최무룡·문정숙이 근방에서 장기 투숙하면서 그들의 실물을 보러 아이들과 함께 자주 찾아가다. 그래선지 한때 영화에 빠지다. 마침 광주 동방극장 지배인이 오빠 친구이기도 해서 초등생 시절부터 부모 몰래 영화를 볼 수 있었음. (그땐 성인영화를 몰래 보면 정학 당하거나 처벌을 받았던 시절이다.) <황혼>, <마농레스꼬>, <길> 등의 명화를 보며 그 마지막 장면에 늘 잠 못 이룬 채 일기장에 감동한 내용을 꼬박꼬박 옮겨 적는 ‘정말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고. 앞에서 소개한 <봄비 1/2>가 기억난다. ‘이름 없는 나무들의 저 빈 가지 끝 숱한 얼굴 속 어디에 단발머리 중학생 시절의 내가 있’을까, 하고 맑은 싱싱함으로 읊었지.

중학 졸업 후, 추운 겨울에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처음으로 서울역전을 밟다. (밤새껏) 완행열차를 타고 새벽에 내린 서울역 전경의 그 쓸쓸함에 너무 놀란 기억. 마포 새우젓 동네에 신방을 차린 오빠 집에 기거하면서 종로의 미션계 고등학교에 전차를 타고 다닌다. 너무 시골뜨기 같다고, 특히 전라도 사투릴 많이 쓴다고 급우들이 웃어대는 바람에 학교를 그만 둘까, 망설이는 동안 결석을 많이 하다. 사춘기 특유의 감수성과 향수병, 이것이 서울에 적응하는 데 저해요인이었다. 가장 예민한 사춘기, 소설을 쓸까 하고 단편소설(거의 엽편이지만) 두 편을 쓰기도 한다. (어느 국어 교사의 ‘누구나 쓰면 된다’는 말도 자극제가 되었다.) 그 중 한 편이 교지에 발표되자, 문학에 대한 꿈을 지닌 채 다시 학교에 나가지만, 고3 입시공부를 하던 중에 교통사고를 당하는 불운을 겪는다. 빈 드럼통을 펴서 외장을 한 버스가 한강 둔덕으로 구르면서 왼팔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입원, 장기간 결석을 하다. 시인은 그때의 충격으로 지금도 가끔씩 놀란다. 크작은 사건에 놀라는 자신을 발견하곤 또 놀란다. (향림은 당시 자기를 구해준 어느 육군 중령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웃으면 앞니가 하얗게 드러난 잘 생긴 얼굴인 그 분’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리곤 집에서 가까운 대학인 중앙대 영문과에 입학하다. 그녀에게 대학생활은 곧바로 본격문학을 하게 된 계기가 된다. 여기서 향림은 영문학자 김병철, 평론가 백철, 그리고 조병화 선생을 만나 뵙는다. 한동안, 시와 소설 중 어떤 것을 쓸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시를 택함. 대학 문학 현상 응모에 시가 몇 번 당선되면서 시를 전문적으로 쓸 것을 결심.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신문 잡지에 투고할 줄은 몰랐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신의 장난일까. 대학 졸업 후 1년 만에 교통사고를 또 당하다. 악몽이었다.) 향림은 연극배우가 될까, 꿈꾸기도 했다. 이런 저런 영향으로, 결국 대학 2학년 때 교내 대학극장과 을지로 입구 원각사에서 영어연극 공연에 참여했는데, 당시 동아일보 <연극 촌평>에 등장인물의 성격을 무난히 소화시켰다는 기사가 실림. (만약에 ‘뛰어난 연기’라고 했으면 연극을 계속했을 것이라고.) 피아노는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을 칠 정도까지만 배웠고, 음악을 너무 좋아해서 요즘도 음악을 틀어놓지 않으면 작품 구상이 안 될 정도라면서 슬쩍 말꼬릴 감춘다. 그런데 음악을 별로 싫어하는(?) 홍 남편 때문에 그녀가 글을 쓸 땐 안방으로 가고, 그는 거실에서 글을 쓴다고. 이런 계기로 그녀는 안방으로 쫓겨(?) 들어온다.) 한동안은 수석을 캐러 충주호나 단강·영월 등을 찾아다님. 수석보다는 ‘시를 줍기 위한 시도’였다는 멋진 말씀. 아하, 시에 가끔 등장하는 수석 이야긴 이때의 체험이겠군.  

대학 졸업 후, 어머니의 적극적인 권유로 한때 유학을 꿈꾸며 영어 공부를 하고 토플시험도 합격했지만, 갑자기 ‘과년한 딸을 멀리 유학시킬 수 없다’는 부모의 변심으로 잠시 방황하다. 이때 향림은 반항하는 뜻으로 문학을 굳게 선택하고, ‘70년 비교적 늦은 나이에 《월간문학》 ‘신인상’에 응모하여 당선, 문단에 데뷔한다. 지금 그녀 스스로 생각해도 당선작 <불>, <불꽃>은 지나치게 묘사에 치중한 감이 있었다. 당시 주간은 김동리 선생이었는데, 지금은 다 작고한 김현승·이동주 선생이 추천해 주셨다. 그러는 중에 향림은 시의 은사이신 김현승 선생 댁(=수색)을 자주 찾는다. 선생께서 이때 그녀에게 가만히 들려주신 말씀, ‘첫 시집만큼은 완벽하다고 생각되는 때에 내야 한다’는 충고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고. 선생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자상하셨다며 향림이 잠깐 회상에 젖는다. 그러나 초창기 생활은 남들처럼 힘들었다. 와우 아파트가 무너진 직후, 싼 집세를 핑계로 그리 들어간 뒤 마포 신수 아파트에서 14년 정도를 더 살았다.   

7년 뒤, 첫 시집 《K읍 기행》을 내다. 진흥원에서 우수작가에게 지원하는 지원금 5만원을 받아 《현대문학》 이름으로 창제인쇄(당시의 대표는 조태일)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책을 만든다. 당시 화폐가치로 약 25,000 원쯤 들었는데, 총판 권리는 평민사가 가져가다. 그런데 첫 시집을 내고 회사가 흑자를 보았다고. 단 500부 한정판으로 책값은 750원이었다. 다 팔리고 반응이 좋은 탓으로 다른 시인들의 ‘왜 다음 시집을 빨리 내지 않느냐’는 성화에 시선집 명목으로 연희출판사에서 펼쳐내기도. 평론가 김현의 해설을 붙여(첫 시집+미발표작) 함께 묶어냈으나, 너무 빨리 선집을 낸 듯하여 지금까지도 약력에 넣지 않고 있다는 그녀의 수줍은 설명. 제목은 《연습기를 띄우고》. 첫 시집을 상재한 이후, 10년이 지나서야 ‘87년 《눈이 오지 않는 나라》(문학사상사)를 펴내다. 이 시집으로 그 해에 <대한민국 문학상>을 수상하다. 1992년에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문학사상사)를 상재. 다른 시와 함께 압해도 연작시 60여편을 수록했다. 여기에 실린 연작시와 우리 가곡으로 만든 <압해도>란 노래가 압해도 사람들에게 전달되다. 게다가 목포 앞바다에 뜬 섬 압해도 주민들 사이에 모금운동이 일어나면서, 1996년에 시비가 신안 군립도서관 앞에 세워지는 영광을 누림.

이어서 몇 권의 수필집을 낸다. 마치 기도처럼―. (그녀가 살아온 풍경/정경이 수록된 수필은 왠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고.) 시는 기도라고 누군가 말했지. 그녀 역시 단아하고 깨끗한 여인이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시인이 코널리의 <무정한 마음>은 즐겨도, 찬송가는 벌써 잃은 걸까. 참, 그녀의 아버지는 비신자였다. 어머닐 가끔 때리고 부엌물건을 던졌다. 멋진 아버지의 이면(裏面)은 그녀에게 항상 의문점이었다. 그때마다 어머닌 피하지도 않고 오로지 ‘주여…’라는 고뇌에 찬 소리만 냈다. 아직도 그녀는 그런 아버지·어머니를 잊지 못한다. 누구도 아직 깨어나지 않은 시각의 정적을 붙들고 기도하시던, 사랑하는 어머니―. 이때 그녀는 진한 슬픔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슬픔도 가슴에 가득하면 따스해지는 법도 알았다. 항시 슬픔으로 몸이 달아있는 자신이었다. 어느새 좋아지고 만 겨울비. 그러나 비가 올 땐 가능한 한 외출을 삼간다. 그냥 그렇게 굳어버렸다. 올해는 라니냐 때문에 눈이 많단다. 그녀는 비를 바라고 있다. 겨울비는 따뜻하다지, 암. 슬픔에 겨워 고개를 숙이다, 나는 조용한 섬 <페닌쉴라>에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입 속에서 상큼, 침이 돈다. 슬픔의 작은 조각이다.      

추위는 그녀로 하여금 어린 시절로 이끈다. 차가운 유리창은 사방에 달려 있었다. 낡은 집은 유리와 유리로 맞부딪치며 덜컹거렸다. 오지 않는 어머닐 기다리는 시인 기형도의 화자처럼, 그녀는 무섬증에 젖을 수 밖에 없었다. 그때 눈이 커졌나보지요? 난 이렇게 묻고 싶었다. 저, 무섬증과 슬픔의 깊이. 그래서 천형(天刑)처럼 생긴 그리움, 사람 그리움. 그리움이 병처럼 깊게 드리운 눈빛이, 반들 윤들거리는 듯했다. 그리고 서성임, 망설임, 흔들거림. 그녀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말수가 없어진다. 차라리 없는 게 더 나았다. 내 앞에 놓인 포크에 한 점 빛이 머물다 사라진다. 어디서 온 것일까.      

우린 자연스럽게 박재삼 시인에게로 화제를 돌린다.

그녀는 오랜 동안 앓아온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크다. 고 박재삼 시인이 생전에 발가락을 잘랐다 해서, 어쩔 줄 몰라 모금 운동에 참여한 기억이 생생할 수 밖에 없다. 박 시인을 처음 만난 때는 28년 전 조선일보 뒷골목 아리스 다방에서였다. 곁엔 김수영 시인도 함께였다. (당시엔 그녀도 발목관절 이상으로 수술을 한 뒤였다.) 내가 알기로, 박 시인을 위한 모금 건(件)은 서벌 시조시인과 함께 향림 시인이 주도적이었다. 지금은 여러 가지 작은 뒷소문으로 아쉬운 부분, 하고픈 말도 꽤 많다고. 문단 사람들은 왜 시인의 순수한 마음을 잘 이해해주지 않을까. 그러나 특히 박완서·이문열 씨를 중심으로 문단에서 예상 외의 호응이 컸다. 이 일로 홍 시인과도 다소 마찰이 있었다고 한다. 약간 불편한 말을 들어가면서까지 그 일을 해야 한다는 점에 못마땅했던 지아비―. 치매로 고생하시는 시아버지로 인해 그녀는 더욱 송구스러울 뿐이었다.

 

효자남편 홍신선

‘내가 눈꺼풀에 뭣이 씌었지.’ 간혹 향림에게 요렇게 투덜댄다는 신선 형이 재밌다. 어이그, 형은 뭐가 잘 났다고! (‘잘났어, 정말’-강태.) 아마 행복에 겨운 모양. 서로 급한 면이 있다는 향림. 한동안은 서로가 원고 심부름을 해주는 부부였다. 신선 형이 어른 문제로 요즘은 약주를 거의 하지 않지만, 가끔 기분 좋으면 ‘노향리임!’하고 부른다나. 에그, 닭살.  

현재, 같은 주민등록지의 홍신선 시인은 ‘65년 일찌감치 시단에 등단한다. 역시 김현승 선생 추천이었다. 곧 군대에 간다. 김현승 선생 댁에서 70년대초(?)에 현재의 남편 홍신선을 만나봄. 그의 첫 느낌은, 수식이나 과장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김 선생과 함께 다방에서 무심코 축구를 같이 보고 아무 생각없이 헤어지기도 했다. <한국시 동인> 모임을 하는 중인데, 뒤늦게 그가 들어왔다고 누군가 소개한 인연으로 더 가까워지다. 결혼 전까지 그녀는 효창공원 근처에서 살았는데 동인 모임이 끝나면 홍 시인과 같은 방향의 버스를 탔다.  숙대 앞 남영동에서 그녀가 내리고, 영등포 하숙집으로 가는 홍 시인과는 금방 헤어졌다.

늘 그런 어색한 데이트를 반복하던 중에 하루는 그가 용감히 따라내리다. ‘스승님(김현승)도 같고 선생께서도 자꾸 우리 둘이 어울린다고 하니, 만난 인연을 뿌리치지 말고 데이트하자’고 도전(!)한 것, 이에 향림은 놀란다. 무작정 숙대 앞 다방으로 함께 들어간 신선은 향림에게 자신을 장황하게 소개했다. ‘자신은 대지주 아들이고 논밭과 임야가 많다’고 했으나, 알고 보니 정반대의 빈털터리(?)였지만. 그들은 데이트를 한다고 효창운동장과 숙대 앞 골목을 주로 걸었다고 한다. 어느 날 고백을 하며(사실 나이 차이로 결혼은 생각지도 못했음), ‘눈이 커서 누님같이 아름다운 분’이며 ‘바다 이미지가 풍긴다’(‘이하 생략’이라며 소리없이 웃는 향림)거나, ‘결혼해 주면 평생 고생 안 시키고, 집필실 하나만큼은 꼭 지어서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하는 등, 여자를 집요하게 유혹(?)한 것이다…. (어허, 신선 형의 어느 구석에 그런 ‘아름다운 눙침/엉큼’이 있었는고. 그런데 웬걸, 그새 8번이나 사글셋방을 옮겼다는 게 사실인가.) 어쩜 신선의 집필실 운운에 향림이 혹했는지 몰라. 그런데 아직까지도 그녀만의 집필실은 없다…. ‘현재는 나의 안방이 사무실이고 거실이며 집필실’이라고 슬쩍 밝힌다. (‘굶기진 않겠습니다’라고 평범히 얘기했다면, 결혼 안 했을 거라는 그녀. 항간엔 양반 홍신선을 따라다녔다는 소문도  파다하던데, 흠, 그게 아니었군.)

잘 알려진 대로 홍신선 형은 효자다. 그것도 지독한 효자다, 일만 있으면 회의를 갖는 집성촌 출신이 누가 아니랄까 봐…. 신경림 시인이 ‘천하의 효자’라고 아낌없이 침을 바를 정도다. 거짓말을 모르는 당신이 말씀하면, 일단 그 얘긴 진실이란 추가 달린다. 그 아버진 지금 심한 치매로 정신 못 차리는 상태. 지금도 형은 특효약이 있다면 어디라도 달려간다. (내가 아는 형으로선 아마 외국까지라도 갈 걸.) 형의 <치매>라는 시가 아련하다. ‘아버지 속의 생판 다른 아버지가 기웃이 내다보며 물었다/니가 누구냐/어머니가 울고/막내딸이 부엌 구석에서 눈가를 찍었다’는 시구는, 형의 동생이 사고로 죽었을 때 축축이 젖은 생말로 하여 내 마음을 기어이 흔들었었지. (형은 먼저 간 동생 자식들을 아직도 건사하고 있다.)

응, 나 미칠 뻔 했어. 아버님이 말야, 동생 죽음 때문에 집이 시끌하니까, 내게 물으시는 거야. 얘, 집에 무슨 일이 났냐아? 예, 아버님. 둘째가 죽었어요, 둘째가. 무어? …그거 참 안 됐구나. 그러다가 3분도 안 돼서 또 물으시는 거 있지. 얘야, 무슨 일이 있냐아? …. 그래애? 그거 참 안 됐구나아.  

 

이게 무서운 중증 치매의 현실이다. 이 글은 나의 산문(《현대시》’96년 11월)에서 옮긴 거지만, 당시 한 잔 술에 곤혹스러워 했던 형의 표정이 생각난다.) 그 아버지 일로 신선 형은, 현재 고향 화성에서 서울(동국대 국문학부 교수)로 출퇴근하는 중이다. 어릴 때 천재 소릴 들어 가까스로 시골을 탈출(?)할 수 있었던 형. 요즘은 그 좋아하는 나물무침 종류를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향림. 홍 시인은 이따금씩 속옷을 가지러 집에 들어온단다. 8년 전부터 당뇨가 있는 며느리 향림은 시부모를 제대로 모시지 못해 그저 송구스러울 뿐이라고. 잠 못 주무시며 밤샘하는 아버지를 곁에서 지켜드리거나, 연로하신 어머닐 편히 잠드시게 하기 위한 형의 극진함은 이미 대학에도 익히 소문나 있다.

향림 시인의 작은 바램이 있다면? 이렇게 묻자, 그녀는 ‘시부모님의 건강과 내가 효부는 못 되더라도 신선 씨의 아내로, 또는 시인으로서 영원히 좋은 시 쓰길 바란다’면서 ‘남편이 늘 건강하고 만족하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램뿐’이란다. 너무나 현모양처? 실제로 향림은 부부간에 존경하는 마음이 최고라는 이 시대의 구닥다리(?)다. 잘 알다시피 둘은 연상의 여인과 2년 연하의 남자 사이(이거 쓰지 말라고 했는디). 자신과 사귀기 전에 알던 여자가 있었다나, 어쨌다나. 신선 씨와 약간 사귈 때 소개도 받았다는데, 형의 그 심뽄 또 무엇이었을꼬. (이것두 쓰지 말라고 했는데, 큰 일!) 헛허, 그치만 향림 시인은 좋겄네.

좋은 시라면, 요즘 물 오른 홍신선이 있고, 노향림·천양희 시인 등이 있다. 1942년생 동갑나기 노향림과 천양희는 흥미롭게 비교된다. 그녀들은 창비에서 함께 시집을 펴낸 뒤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는다. 이경철(중앙일보)은, 양희 시를 ‘시인의 마음 속으로 들어온 자연이 다시 시인의 목소리를 빌어 우주적 삶의 깨달음을 들려’준다 했고, 향림 시를 ‘내릴 손님이 없어 폐쇄된/시골 간이역에서/낭자하게 피흘리는 선홍빛 샐비어 꽃/문득/철길을 따라 걷는 가을이/맨손으로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지며/선연한 피들을/닦아주고 차마 돌아서지 못한다’는 시 <위로>(전문)를 선(選)하면서, ‘자연은 자연대로 살려두며 정을 표나지 않게 덧씌우’는 시인들로 분류한다. 게다가 나는 최근 《문학사상》 《詩眼》에 실린 홍신선 형의 <봄날>(전문)을 보고 저으기 놀란다.

 

암나사의 터진 밑구멍 속으로/한 입씩 옴찔옴찔 무는 탱탱한 질 속으로/빈틈없이 삽입해 들어간/숫나사의/성난 살 한 토막//폐품이 된 이앙기에서 쏟아져 나온/나사 한 쌍/외설한 체위 들킨 채 날흙 속에서 그대로 하고 있다/둘레에는/정액 쏟듯 흘린/제비꽃 몇 방울        

크, 좋다. 내 솔직한 체질에 맞는, 커! 물이 올라도 한참 올랐다. 따뜻한 ‘봄날’은 시작(始作)을 뜻한다. 겨우내 묵은 시골 곳간(창고 쯤일까)의 녹슨 기계를 손질하기 위해 꺼내던 화자는, 순 살내나는 농기계류에서 이탈한 나사못 몇 개를 발견하곤 아름다운 외설을 꿈꾼다. <시작메모>를 보자,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이 자기 수리를 한다. 그 수리작업 가운데는 성도 들어 있다.’ 이렇듯이 늦둥이(바람 필려나,) 숫내 풍기는 신선 형님, 제 것이 ‘폐품이 된 이앙기’가 아니라 만만 다행(萬萬多幸)인 걸. 남자가 물 오르면 무엇을 축축이 적실 건가. 궁금타. ‘외설한 체위’ 또한 지치도록 아름답다. 여직 ‘날흙’ 내음을 풍기는 한, 형의 속살내도 싱싱하겄네. 오홍, 향림도 덩달덩달 춤추는 덩달이라네! (각설하고.)향림에겐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폴 발레리 시구가 젊은 시절의 가슴을 적셨다. 하지만,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세월 앞에선 속수무책이어서 ‘난 한동안 무엇을 했지?’하는 자책이 경구처럼 들렸다는 그녀의 고백. ‘이제부터는 시간이 내게 찾아와 주는 게 아니라 내가 시간에게 다가가는 것’이라는 그녀의 낮은 읊조림이 가찹게 울려온다. 오, 무서운 고독감. (30년을 그녀는 오로지 시를 써왔다!) 그녀는 젊은 시인들에게 부탁한다, 자기 개성대로 갈 길을 가라. 너무 유행시에 민감하지 말라. 특별히, 여류들이여, 선배들과의 교류를 자주 가져라. 계속, 계속 써라. 그녀 자신도 임시직 아르바이트(영문 편지 쓰기) 말고는 직장에 몸을 담은 적이 없다. 우선 꽉 짜인 조직사회가 자기에게 안 어울리고 그저 보통사람(노태우 식이 아닌)·보통생활이 마음에 든다고. 그녀는 자신을 ‘외향적으로 성공한 삶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오기(傲氣=시) 하나로 버티며 산다. 그러나 시와 함께 하는 삶이 내겐 절대로 평탄치 않아 보였다. 다음은 문단 전체가 섹트주의를 버려야 한다는 말씀, 또 소외 문인을 챙기야 한다고 역설한다. 향림은, 그러므로 극적인 삶을 지내온 헤밍웨이를 존경한다. 시집으론 휘트먼의 《풀잎》, 소설로는 트루만 카퍼티의 같은 제목 <풀잎>이 인상적이라고. 진정 뛰어난 묘사라며 후한 점수를 준다.

결혼해서는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결혼하고 보니 홍 시인의 자잘한 일상과 삶의 모습이 다른 사람과 너무 같아 보여 조금 실망하다. 지금은 오히려 이러한 것들이 삶의 본질이고 시의 본질임을 깨닫는다. 현재 홍 시인과의 사이에 외아들 승국이 있는데, 군대 마치고 와서 홍대 전자공학과 3학년 재학중. 신혼 초까지만 서로 어디에 발표했는가 관심을 갖고 발표된 작품의 서로를 평가해서 위로가 되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서로 바쁘다 보니 어디에 발표했는지도 모르고, 원고 심부름을 서로가 해주던 초기에 비해 이젠 전적으로 그녀가 남편의 원고 심부름을 하는 편이다. 정말, 집필실 차려주고 시간과 자유를 무한정 주겠다고 속삭이던 결혼 전의 약속은 ‘오데로 갔나’, 형.

어느 날, 서정주 선생께서 문학 강연 차 모교에 내려와 말씀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한편의 수채화처럼 느껴온단다. 향림은 그때 미당 선생이 하신 말씀 한 토막을 건져낸다. ‘시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쓰고자 하는 마음만 먹으면 보는 것이 다 시가 된다.’ 그리고 강당에 모인 중학생 모두가 백일장에 들어갔으나 수줍음 많은 향림은 끝내 제출하지 못하다. 시인이 된 뒤로 그녀는 <부끄러움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산문을 쓰고, ‘이 부끄러움이 있는 한 문학을 할 것 같다’고 내면적으로 다짐하다. (그때 응모하지 못한 부끄러움으로 하여 ‘반드시 시인이 되고야 말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다. <송아지>란 작품으로 장원이 된 아이가 서울로 초청되어 창경원·덕수궁까지 다녀왔다고 하도 자랑해서 자존심이 몹시 상하기도 함. 그 작은 계기가 시를 쓰게 한 근원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고.)지병 당뇨로 병원 드나들기는 평생의 업인가 보다. (유아기에 세상을 인지할 무렵, 폭식(暴食)을 하고 쓰러진다. 당시엔 그 병을 몰랐으나 아버지의 인자인 ‘유전성 소아성 당뇨’였다. 오랫동안 앓아온 그녀로서는 투병하는 후배를 보면 참말 눈물겹다. 급성 백혈병(?)을 이겨내는 최춘희 시인한테는 종종 전화를 건다고.) 그녀는 이를 ‘혼자 가야 하는 외로움’으로 표현한다. 끊임없이 혈당을 체크하고 약 타오는 일은 쓸쓸함 이상인 것. 실상 이 절대적 외로움이 드러나지 않게 표정 짓는 일도 그녀에겐 중요한 일과로, 또 다른 ‘표정 관리’에 속한다. 식이요법과 운동 그리고 맑은 공기를 쐬라는 의사의 충고가 성화지만, 지키기가 어려워 집 주변, 즉 고수부지 등을 가볍게 산책만 한다. 요즘은 먹는 일이 특히 괴롭다. 식단에 의한 식사는 아예 하지 않고 있다. 이젠 오른쪽 엄지손가락 관절에도 당뇨 증세가 와서, 모든 원고는 유성 싸인펜을 사용하고 있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에 눈이 간다. 안으로 감춰져 있다.) 그래서 컴퓨터를 조금씩 배웠다. 최근에 나온 시집에 싸인을 다 하지 못해서 아직 못 부친 분들께 죄송하다는 향림 시인의 생각.

 

짧은 여행벽

시가 되지 않으면 그녀는 휴대용 CD플레이어를 귀에 꽂고 무조건 전철을 탄다. 부끄럽지만 이때만큼은 소녀로 변신하는 것이다. 브르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 1번 2악장을 레시버로 혼자 듣는 맛도 괜찮으니까. (어허, 말러나 브르흐!) 종점에서 내리지 않고 되돌아오기…. 주로 5호선 마포역에서 출발, 당일 여행을 혼자서 가슴 설레며 다녀오기도 하고, 비오는 날은 덕수궁도 간다. 그 곳 부근엔 러시아 정교회가 세운 성공회 건물이 있는데 뾰죽지붕이 비 맞는 모습은 야릇한 이국 정서로 가슴이 찡한다고. 그러는 사이, 바하나 베토벤(특히 피아노곡)을 즐기게 된 것은 순전한 글렌 굴드(피아니스트) 때문이었다. 시 내음을 풍겼지만, ‘내 장례식에 조문객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염려했다는 염결·완벽 주의자(대중 기피증도 있음)인 그는 ‘80년대 후반에 소리없이 사라진다…. 달랑, 레코드 몇 장만 옆구리에 끼고 대구로 피난간 김종삼 시인이 이해되고 사유(思惟)에 여백미를 지닌 김현승 시인, 시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김춘수 시인을 그래서 멋깔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래서인지 향림은 김종삼 시집 《평화롭게》를 가끔 읽는다. 아아, 30여년 전의 감동, <북치는 소년>! 그런만큼 원로들이 정정하게 시작에 몰두하는 모습이 존경스럽단다. 그분들이 좋은 시를 발표할 때는 읽는 우리도 즐겁다. 기억나는 분으로는 당연히 고 김현승 시인이고 평론가 김현이다. 그리고 또 한 분은 김종삼 시인. 그분은 향림 시를 꽤 좋아하셨다고 한다. 술로, 간 경변에서 암으로 진행되는 줄도 모른 채 소주병을 몰래 뒷주머니에 넣고 정릉 꼭대기 집에서 광화문(조선일보 뒷골목) 아리스 다방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그때 만나기만 하면 여류시인 K의 안부를 묻곤 했던 기억이 안타깝기만 하다고.  

그녀가 자주 찾는 곳은 신촌 대학거리와 시댁 화성이다. 가는 길을 묻자, 덜컹대는 완행 버스가 춥고 을씨년스런 긴 논둑길을 돌아 다시 얇게 어는 신갈호수를 끼고도 한참을 뽕나무밭을 달려가야만 시댁마을에 도착한다는 설명이다. 그 밭이 좋은 것은, 마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자작나무숲이 연상되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그녀는 안에 있는 자신에게 속삭인다, ‘서울에서 채일 듯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낯선 곳이기도 한, 물이 있는 수채화 같은 풍경…. 그래요, 물이 있는 곳에선 내 가슴에 영롱하게 맺히는 그 무엇이 있어요.’ 곧 제2의 압해도 섬이다. 두 곳이 유이(有二)하게, 풍경을 통해 그들의 솔직/정직을 그들만의 알람소리로 울려준다. 숲에서 나오니 숲이 더 잘 보인다고 하던가. 밖은 가을인 듯 싶은데 첫 눈발이 날린 지 꽤나 지난, 이젠 겨울이다. 이렇게 혼자 있어 지속적으로 아픈 동안, 그녀에게 친구가 생길 리 없었다. 아니, ‘없어왔다’란 말이 알맞는 말일 듯 싶다. 그저 시를 통해 오로지 말하고 답하고 음미하는 향림 시인. 후배 시인으론 박라연·고형렬·장철문 등이 좋은 느낌을 준다고. 시와 나이는 아무 상관없단다. 괜찮은 후배 시인들 모두가 친구 겸 애인?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1996년 10월, 드디어 압해도에 시비를 세우다. 어머닌 향림이 어릴 때부터 진한 사투리로 ‘저 너미(=너머)가 압해도여어’ 했다. 실제로 그녀에겐 압해도가 그리움의 전부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압해도 연작시집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녀는 최대한 이 섬을 가슴에 은닉한다. 단지 들키는 게 싫어서.

 

머리를 들 듯 들 듯/들지 않는 섬/턱을 들어 올리려고/물결 위로 기어와서/작은 손가락으로 간질이는/새벽빛도 있으나/평생을 그는 들지 않았다/고개를 들어봐도 거기에는/흩어져 날리는 흰 깨끔같은/허무밖에 더 있을까/숙인 채 그는 그 자리에/단단히 숨어들어/머리를 들 듯 들 듯/들지 않는다/이제 나도 그에게로 가서/그의 섬이 되고 싶다

― <섬> 전문  

 

그녀는 목포에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압해도를 ‘내 정신의 주소‘(서문)라고 당당히 천명한다. 오죽 좋으면 가곡으로 재탄생되었을까, 그 섬이.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최영섭 씨에 의함.) 이에 압해도 주민도 가만 있지 않았다. 그들은 올 10월 5일, 신안군립도서관 내에 ‘향림시비’를 드디어 세운 것이다. 실상 압해도 주민은 매우 가난했다, 그들의 소망은 오로지 뭍으로 가는 길뿐…. 더구나 7천이 넘는 가옥의 개개 성금을 시비 제작비에 충당했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우리들 마음을 적신다. 이젠 압해도를 그녀 마음에 심었다, 자주 찾지는 못할지라도.   

 

진정한 시쓰기와 독서

‘90년대는 상업주의 문학이 판을 친 연대지만, 깊이 있는 서정성으로 돌아가는 시들이 많아 고무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이즘이나 이념을 떠나서 진정으로 좋은 작품을 써야한다는 각오를 새롭게 할 때. 특히 젊은 세대는 시가 근본적으로 말의 압축이란 걸 염두에 두어야 할 거라는 단단한 부탁. 그렇다. 산만한 산문으로 흩으러 놓은 것만이 시의 길은 아니란 걸 생각해주면 될텐데. 시의 흐름과 전개를 몇 가닥으로 잡아서 쓰는 건 무리지만 다양한 시적 개성들이 폭발적으로 드러난 때도 ‘90년대였지, 아마. 이런 변화들이 진행되면서 자아의 재발견은 개성이 드러난 연대였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새로운 문학적 욕구의 발현으로 긍정적인 면이 있으나 산문적 의미나 논리로만 시를 쓰는 것 같은 안타까운 점도 있었다. 향림은 말한다, ‘시작(詩作)의 기본틀은 암시적 묘사나 이미지의 시를 계속 쓰면서 이미지 뒤에 감춰진 의미나 정서는 더욱 심화된 시를 쓰고 싶어요.’ 과작이더라도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이란 말을 듣고 싶다는 덧붙임. 나는 그녀가 살며시 내미는 메모를 펼친다. 자기만의 시구로 ‘물금 긋기’를 고대하는 무섭고 강한 의지가 서려 있는 글. 순간, 나는 그녀를 아주 정직하게 바라본다.

 

나의 오관을 건드리며 자유롭게 피어나는 꽃, 그것들은 죽어 있던 나의 의식을 깨워 흔들며 시의 물금들을 긋는다. 시구(詩句)들이 반짝반짝 살아나는 한때, 나는 이것들을 줍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인가를 줍는다는 것―. 결국 사람 냄새가 아닐까. 그래서 그녀는 울음이 흔한 것인가. 어릴 때부터 너무 울어서, 의도적으로 애써 감추려는 흔적이 군데군데 나타나지만. 고통은 이렇게 해서 나타나는 법이다. 그래서 시인의 생각은 이렇다, 고통은 꿈과 같은 동의어라고.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몸살을 앓으면서도 종국엔 서로 잘 융합된 숨결이고 통일된 이미지라고.

 

대독서가는 아니지만, 그녀는 가끔 산문을 읽는다. 아주 최근엔 《모리의 마지막 수업》을 읽다. ‘94년 사지를 못 쓰고 결국 숨쉬기 어려워 사망에 이르는 희한한 병 루게릭으로 인해, 77세로 죽은 사회학자 모리 교수. 죽음의 긴 사색을 통해 걸러낸 그의 주옥같은 잠언집이라 할까. 모리 슈워츠Morrie Schwartz의 ‘개인적이고 사적인 죽음을 공동체 정신으로 받아들이면 슬픈 죽음이 되지 않는다’는 말에 향림은 푸근해졌다고 한다. 나는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란 다른 제목의 강의집을 읽는다. 20년 전의 제자 미치 앨봄Mitch Albom이 엮은 글이다. 그는 모리 교수의 마지막 제자로, 매주 화요일마다 자택(겸 병실) 강의에 참여한 수강자는 단 하나, 미치뿐이었다. 이 책은 그의 아포리즘 모음집으로 인간의 ‘착취성 취향’을 곳곳에서 부드러운 듯 강하게 거부한다. 그는 죽는 것까지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우리에게 잔잔히 전하고 있다. 책 서문이 우리에게 묻는다, ‘여러분들은 혹시 이런 스승이 안 계시냐’고. 책 끝이 내 마음 심지를 건드린다, ‘선생님의 재가 땅 속에 뿌려졌을 때, 나는 무덤을 둘러보았다. (중략)/자네가 말하라고, 내가 들을 테니.” 선생님은 (늘) 그렇게 말했었다. 머릿속으로 그렇게 하려고 애를 썼다. 행복하게도, 그런 상상 속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갑자기 나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목 시계를 보고 그 이유를 깨달았다./바로 화요일이었다.’그녀는 가끔 소설 읽기를 좋아해서 최인석 소설을 문예지에서 즐겨 읽기도 한다. <일년>(예슈노즈 작)이란 소설도 최근에 읽었다. 인물을 공략하고 추락시키는 짧은 장(章)의 구성 때문에. 작가 자신도, 긴 묘사를 한 단어로 처리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는 <후기>가 깔끔했고, 문체의 행동주의가 대단히 소중하다는 말도 좋았다는 것이다.

향림의 수필집도 괜찮다. 인터뷰 중에도 별로 밝히길 꺼리는 듯한 표정이 재밌다. 특이한 제목인 《키낮추기 꿈높이기》란 수필집을 받은 기억이 나네…. 그녀는 특이하게도 마음에 드는 시 몇 편을 자신이 직접 고른다. 김현이 가장 좋은 작품으로 꼽았다는 <꿈>. 진술하는 듯한 이 시를 보고, 정과리가 ‘말이 곧 시가 되는 시인’이라고 한 걸까. 그녀 자신은 <K읍 기행> <가을날> <교외>를 든다. 나는 이번 시집에서 <敵> <창> <집> <정선아라리 1/2/3> <산천동> <어떤 개인 날> <바람 부는 날> 등을 선택한다. <南天>이 나는 꽤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 향림 시가 변모한다, 했다. 재차 변화하고 있다. 초창기 작품들 중에서 어린 추억을 담은 <꿈>을 보자.     

 

바다가 앞에 와 있었다/뻘밭 사이에 처박고 있는/그의 얼굴이 늘 보고 싶었다/신음소리가 귀신이 되어 나오던/집 한 채./철사토막 같은 손으로/바다소나무들은/앙가슴을 가리고 있었다.//사람냄새가 그리웠다/긴 복도 끝/육조 다다미房에 복막염으로/나는 누워 있었다/사금파리, 야생초, 생고무냄새/바람 사이의 흐릿한 호얏불,/오래 문 닫힌 대장간에 쌓여 있는/靜寂들이 보고 싶었다.//나는/심심풀이로 바다의 몸을/만지작거리곤 했다/꿈에서 깨어나면 미끈거리는/소금기만이 마음에 가득히/묻어났다/바다는 늘 앞에 와 있었다.

― <꿈> 전문

 

이 시는 어느새 현실의 화자를 다시 출연시킨다. 그녀가 그리는 건 사람내. ‘오래 문 닫힌 대장간에 쌓여있는/靜寂들이 보고 싶었다.’ 그녀는 ‘심심풀이로 바다의 몸을/만지작거리곤 했’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미끈거리는/소금기만이 마음에 가득히/묻어났다’. ‘정적’은 정말 향림 시인의 대표적 이미지가 아닐까. 제3시집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에서 향림은 시집 간행의 기분을 이렇게 되뇐다.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고, 나 자신이 너무 이룬 것 없이 살았다는 자책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자아나 희망·욕망 같은 것이 생성된다고나 할까요. 독자가 있건 없건, 모든 시인은 한동안 잠 못 이루며 설레는 그 맛 때문에 시집을 내는 게 아닌가요. 저도 한동안 마음이 설랬지요. 김 선생(강태)은 그렇지 않나요?’ (그러나 그 자책감은 자신이 ‘늘 혼자라서 외롭다’는 생각에서 생겨나는 것 같다고.) ‘진정한 외로움을 깊이 앓는 독자에게 드리고 싶다’….      

그럴 것이다. 그녀에겐 압해도가 곧 후투티다. 압해도는 현실적 아픔이 그리움으로, 후투티는 미래지향적인 비젼이 살곳하게 깃들어 있다, 조심스레. 고독의 탈출구로 그녀는 삶의 많은 부분을 시에 의존한다. 시집이 나온 뒤, <창비>에서 시인 이시영이 예쁘게 말해준다, ‘설레임이 있으시죠?’ 기쁨도 잠시, 금세 볼 붉히며 ‘부끄러움이 있는 한, 시를 쓸 수 있다’고 자신에게 끝없이 다짐한다. ‘좋은 독자를 찾아, 짤막하고 강한 울림을 주는/때리는 시’를 정말 그녀는 쓰고 싶다. 사실 나는 《후투티…》에서 일부 ‘청신한 그리움과 격조 있는 비젼’을 읽으며 즐거울 수 있었다. 그녀는 후투티를 전라도의 아픈 역사와 연관짓는다. 이 새는 충청도에서 머물지 전라도까진 날아오지 않는다고. 로마병정같은 관을 쓴 후투티는 이제서야 텃새화한 것 같다는 보충 설명이다. 이루지 못한 꿈을 찾는 새? 그녀의 내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새가 아닐까. 나는 자료를 찾아넘긴다. 실제로는 28㎝ 크기로 흑백색의 줄무늬에 핑크색을 띤 갈색무늬 새인데 파도처럼 난다고. 재밌는 것은 새가 울 때 ‘뽀뽀, 뽀뽀’ 혹은 ‘뽕, 뽕, 뽕’하고, 걸어다니면서는 ‘쿠우, 쿠우’ 한다는 점이다. 주위를 경계할 땐 ‘냐아’ 하고 운다는 귀여운 새다. ‘(너 누구)냐아?’ 하고 암구호를 묻는 양으로? <후기>에서 그녀는 ‘정신의 한 정점을 향해 나는 과연 비상했는가를 자문’한다. 그 이전에 향림은 ‘나는 늘 혼자다. 이 말처럼 완벽한 말을 나는 아직도 발견하지 못했다’며, 자신의 내면을 향해 나직나직 읊조리곤 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픈 체험에서 우러난 말을, 또는 기호를 우리에게 던진다. 한 예로, 좋은 시 <남천>(전문)을 감상해보자.

 

남천은 괴롭다/고층 아파트 베란다로 이사온/그가 까마득히 내려다보는/절벽이 삶일까 생각하는 사이/멈췄던 생각들이 주춤주춤 빠져나간다//각혈하듯 제 잎들을 토해서/빨갛게 언 발등을 덮는다/추위에 꼼지락거리는 화분 위로 내놓은/발가락이 많이 텄다//강변도로에는 혼돈이 식어서 밀리며 정체중이다/밀리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나트륨 가로등의 목에 겨우 걸터앉아 조는/짧은 오후가 서쪽 하늘에 밀려 있다//눈뜨면 이마에서 사라지는/쇠오리들의 발꿈치//밤섬이 한 순간 수많은 은빛 가락지들을/뒷발질해 띄워올린다/출렁거리던 섬이 마침내 상공으로/떠서 날아간다//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한겨울 오후/남천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찬 땀을 매달고 섰다 (《현대문학》 ‘98년 2월호)

 

최현식은 ‘관상수 남천촉(南天燭)’을 노래한 향림 시의 맛을 한층 돋구었다. 걔를 향한 시인의 연민 어린 시선은 곧 자아와의 동일화 추구라고 정리한다. 공감한다.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한겨울 오후/’남천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찬 땀을 매달고 섰다’는 구절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중심으로 양쪽에 냉기(冷氣)를 부여한 까닭을 풀어줘야 할 필요가 있다. ‘소름’과 ‘찬 땀’은 전도(顚倒)하지 않는 긴장을 유발시킨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인해 더 팽팽한 긴장의 끈을 팽팽, 줄당기기하고 있다. 마침 그 ‘얼굴’―쉬임없이 진땀 흘리는 얼굴은 붉을 수밖에 없다. 시 <남천>의 미학은 이곳에 있다. 나는 또 <남천>에서 시인의 고소공포증을 읽는다. 동병상련이요, 몰아(沒我)에 가까운 감정이입이 아슬아슬하다. 이 시는 새롭다. 그녀의 기존 시의 관념을 뛰어넘은 작품이다.

그녀는 붉은 꽃에 애착을 갖는다. ‘어둡고 습한 상처를 내장한 시간’으로 푼다. 돌담의 꽃들이 붉은 상처처럼 피어서 자기를 부르는 것 같다고. 그들에겐 따스한 빛이 긴요하다. 그러므로 투명한 소리와 빛들, 이것이 있는 한 그녀는 시를 계속 쓸 것이다. ‘내 안의 언어와 형태가 또 다시 서로 싸우고 마찰하는 걸 보며 시인은 다시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소리를 듣는다. 싸우고 마찰하라, 부딪고 마찰하라.

이승훈은 향림의 ‘시간 인식’에 대해 언급한다. ‘한결같이 간결한, 투명한 이미지로 일관’하는 걸 추킨다. ‘이상’할 정도로 ‘한번도 수다를 떤 적이 없고, 자신의 삶을 설명한 적이 없’는 그녀의 ‘시적 고집’을 좋아한단다. 시 <달맞이꽃 핀> 중의 ‘밀봉된 시간은/풀기 없는 빗소리로 양 옆 배가/불룩하다’와, ‘개봉되지 않은 여름 한끝’을 시간의 공간화로 푸는 시각/인식이 한결 산뜻하다. ‘양 옆 배가/불룩’할 정도의 ‘밀봉된 시간’도 새뜻하다. 이미지, 이미지!윤재근은 ‘관념·사상을 배제한 사물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언어 그 자체’라고 말한다.

 

오랜 만에 만나는 분위기.//하나의 선이 되어 평야가 드러눕는다.//일대는 무밭이 되어/회색 집들을 드문드문/햇볕 속에 묻어 놓고//몇 트럭씩/논밭으로 실려가는/묶인 고뇌와/고장난 時間들.//지나다 보면 낯이 선/사투리들이/발길에 툭 툭 채였다.//길가 사람들 속에서/구부정한 말채나무가/혼자 목을 쳐들고./할 일 없이 혼자 쳐들고 있다.

― <K읍 기행> 전문

 

초기시 <K읍 기행>은 묘하게도 <봄비 1/2>를 환기시킨다. 기본 정서가 같다. 그러나 <K읍…>은 현장 기행 감각을 살렸지만, <봄비…>는 향림 특유의 추억이 서린 채 기인 그림자를 끝없이 이끈다. 어쩌면 화자(시인)는 ‘길가 사람들 속에서’’혼자 목을 쳐들고’ 있던 ‘말채나무’였을지도 모르겠다. 시 <가을날>은 조금 김춘수 시 냄새가 나지만, 그 명확·명징한 이미지가 시인다움을 믿게 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하늘 높이/새똥만한 구름 사이에선/누군가가 반짝 보여주는/주머니칼 하나’가 너무나도 생생하다. 여기서 ‘주머니칼 하나’란 가을햇빛 한 점이 아니겠는가.

 

먼 풀밭에/활주로가 까만 고무줄처럼/몽땅 풀려져 나와 있었다.//간이 비행장.//한 끝의 신호기 너머/얼굴이 뻘겋게 취한/夕陽이/이제 막 돌아와 서 있고//격납고 속에는/부서진 명령과 鄕愁가/난삽하게 쌓여 있다.//그 앞에서/얘기를 마악 끝낸 바람들이/제 신발들을 부산하게 찾고 있다.//하늘 높이/새똥만한 구름 사이에선/누군가가 반짝 보여주는/주머니칼 하나.

― <가을날> 전문

 

<골목>(부분)은 멋진 시다. ‘뉘 집일까. 조금 열려진 대문 사이로 허공이 빠져나가고 없다./뒤에 구멍난 창공은 전 생애처럼 너무 크다./그 곁에 쌓여있던 정적이 살이 긁히거나/혓바닥이 깨어진 채 흩어져 있다’는 노향림의 <골목>은 대체 어떤 곳일까. 이것은 성능 좋은 더듬이를 가진 카메라 렌즈를 연상시킨다. ‘허공’이 빠져나가거나 ‘소리들’이 ‘교외에서/정신을 팔고 있’다. 독특한 것은, 골목에서 환기하듯 빠져나간 저들을 바라보는 이 곳에는 혹시 시인의 따스한 눈길이 준비/내재되어 있는 건 아닐까. ‘골목에서 데리고 나간 길들이/낯선 풀잎 앞에 꿇어앉아 있’는 길은, 화자의 낯선 비극적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여기서 나는 시인의 예사롭지 않은, 전혀 새로운 시각에 놀란다.

 

후투티, 후투티

시간이 누렇게 변해가는 게 보인다. 꽤나 오래되었다. 난 이상하리만치 말이 없는 노향림 선배시인 앞에서 애꿎은 연어무침만 절걱절걱 씹어삼킨다. 그녀 목소린 다분히 떨렸다. 나에게 그녀의 커단 눈이 ‘괜히 인터뷰했네’란 의미의 포커스를 건넨다. 건넸다, 분명히. 간절한 눈빛도 상긋한 푸성귀 몇 쪽에 남은 듯했지만 나는 노트를 덮고 일어서기로 한다. 향림의 질좋은 렌즈를 만지작거리며 거릴 조절하듯, 난 이미 인터뷰의 마무리를 다듬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심층 깊은 곳을 긴밀히 탐지하는 듯했다. 그녀를 날려보내야 할까. 노향림은 영원히 시를 찾아 날아가는 후투티. 후투티, 안녕. 난 그녀와 헤어져, 조용히 을지로 입구 지하도를 빠져나간다.

(199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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