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서정주
花蛇, 큰 산으로 똬리 틀다
장경기
花蛇, 神人을 꿈꾸다
푸드드, 암자의 열린 창 틈으로 날아든 것은 박쥐였다. 벽에 부딪치듯 붙었다가는 이내 떨어지고 다시 붙기를 반복했다. 집요하게 한 생각에 골몰해 있었던 때문일까? 무심코 박쥐를 거머쥔 그의 손이, 양 날개를 바늘로 꽂으며 벽에 고정시키고 있는 동안에도 그의 표정은 미동의 변화도 없었다. 푸덕거리는 박쥐의 몸에서 생명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모습을 그의 눈만이 꿰뚫을 듯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차츰 박쥐의 희미한 푸덕거림조차 사라지자, 그 해인사 願堂 암자는 다시 정적이 장악했다. 그의 눈은 여전히 박쥐에 고정되어 있었으나, 이미 그의 정신은 내면을 응시하면서, 잡힐 듯하면서도 달아나는 어떤 모호한 이미지를 집요하게 좇고 있었다. 이마에는 식은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렇게 몇분이나 흘렀을까. 그의 눈이 번쩍 빛을 발하듯 크게 떠진 채로 굳어졌다.
이미지가 확연한 모습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것은 해인사가 박혀 있는 가야산임에 틀림없었으나, 산은 꿈틀 움직거리고 있었다. 산 등에 화사하니 꽃들이 만발한 산이, 그 커다란 몸을 꿈틀거리더니 이윽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배암, 배암, 꽃배암, 큰 꽃배암이 그의 내면 속을 쫓기듯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 배암은 쫓겨 달아나는 자신의 삶의 모습이 되기도 했다. 그의 생이 쫓기어 달아나고 있었다. 지난 생의 모습들이 꽃배암의 문신처럼 확연히 떠오르며 그의 머릿속을 줄달음치고 있었다.
5년 전, 그러니까 1930년 11월 광주학생 사건 2주년 당시에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 4명의 주모자들 중 한 사람으로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감옥에 끌려가기도 했었던 일들, 그때 연인을 흠모하듯 좇았던 사회주의사상, 결국 낙향하여 고창고보에 입학, 백지동맹사건으로 다시 권고 자퇴, 1932년,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 <40년> <배반자> 등에 대한 탐닉, 그러나 단편소설 <동지>를 읽고 난 후의 회의, 투르게네프의 장편소설 <그 전날밤> 속의 ‘인사로프’와 ‘에레나’ 사이의 그 사랑의 자유를 모색하는 아름다운 이야기에의 감동…… 그리고 막심 고리키의 위의 단편소설과 투르게네프의 <그 전날밤>의 두 개의 인생을 비교하면서 전자를 버리고 후자를 택하는 길을 밟기로 했던, 곧 이념을 버리고 문학을 선택하기로 했던 17살의 봄, 그리고 그해 가을, 그러니까 1932년 초가을, 니체와의 만남.
<찌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를 흥분고조시키며 새로 각성시킨 가장 중요한 점은 ‘인간이며 동시에 신의 가치로서의 초인’의 설정이었다.
“‘신의 의미를 생각해 낸 것도 사람이었으니, 그런 사람의 자격은 신을 겸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니체의 그 초인을 찬성하면서 그런 초인의 영원을 느끼고 있자니, 야! 거기에선 참 큰 산덩어리같이 자기 존엄과 환희의 느낌이 용솟음쳐 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벅찬 감동과 열망의 가슴팍에 비해, 그가 딛고 있는 현실은 얼마나 척박하고 각박하게 이 순간까지 그를 몰아대 왔던가. 그의 머릿 속에서는 여전히 큰 꽃배암이 달아나고 있었다. 뱀의 몸뚱어리에는 자신의 지난 생의 모습들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배암, 배암, 꽃배암, 그 꽃배암을, 달아나는 生을, 백지 위에 고스란히 형상화시키려, 집요하게 그의 창작욕은 또한 그 이미지들을 뒤좇고 있었다. 그러나 펜은 백지 위로 내달리기를 거부했다. 그의 이마에서는 식은 땀이 비어져 나왔다. 가슴 속에서는 터질 것 같은 뜨거움이 일렁였다.
그는 깊은 숨을 몰아쉬면서, 벽에 죽은 채, 붙어 있는 박쥐 아래, 역시 소리없이 놓여 있는 자신의 분신들을 문득 보았다. 몇 개의 글자로 환신해 있는......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별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1)
<自畵像>이라는 시였다. 그 시의 다음 장을 무심코 들추자, 또 하나의 분신이 붉은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문둥이였다.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우름을 밤새 우렀다.”2)
“문둥이란 시 잘 보았네. 무섭드만.”
그 시를 보는 순간, 李箱의 말을 떠올린 것이었다. 지난 늦가을 밤술집을 순례하던 때의 일이었으니, 벌써 일년이 돼가는 셈이었다. 벽에 붙어 있은 채, 이미 박제가 되어버린 박쥐처럼, 밤에만 나타났던 李箱, 그와 같이 걸었던 기억이 간절하게만 느껴졌다.
‘아 밤은 참 많기도 하더라.’
수식의 옷을 다 벗어 던져 버린 나체 언어의 직통적인 매력, 이런 것들이 시를 깃발로 삼은 그에게 어찌 무관심거리가 되었겠는가.
李箱과 함께 정지용, 김영랑의 얼굴도 떠올랐다.
“사람이 아무리 서럽고 비참해도 역시 촉기는 어딘가 있어야 해. 그렇지도 못하면 그 사람은 살 수도 없고 남까지도 두루 줄구게 돼.”그에게 독려하듯 울려오는 영랑의 말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내면 속에 꽃대처럼 호올로 솟구쳐 오르는 말은그들과는 다른 ‘내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어리냐시는 잘되지 않았다. 꽃배암을 집요하게 좇았지만 손길이 뻗는 저편으로 스며들며 연신 사라졌다. 글자로 백지 위에 똬리 틀기를 거부했다. 펜을 집어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깊게 숨을 몰아쉬는 것으로 삭여야 했다. 石顚 朴漢永 大宗師의 얼굴이 떠오른 때문이었다. 톨스토이 사상에 젖어 넝마주이로 떠돌던 소년시절에 인연을 맺은 후로, 그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온 분이었다. 대종사는 큰 바위 얼굴처럼 그의 내면을 굽어보고 있었다.
“정주! 최남선이 같은 사람도 공부하려고 담배를 아주 딱 끊어 버렸었다. 그까짓 하나를 주체 못해 가지고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해! 이 사람아!”언젠가. 담배 하나 제대로 끊지 못하는 자신을 나무라던 이 말이 다시 그를 질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주는 그의 두 눈총 앞에 자신을 꼿꼿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고, 내 새끼야!”
이번에는 할머니 목소리였다. 마루에서 막 굴러 떨어지려는 자신을 받아 안으면서 할머니가 지른 소리였었다. 다섯 살 때의 일이었으리라.
석전의 질책이 할머니의 그 가슴 아파하시던 안타깝고 슬픈 울림의 말과 더불어 하나로 겹쳐 그의 안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혼신을 다해서 창작에 몰입했다. 백지 위로 꽃배암이 내달리는 것을 보았다. 그의 펜 끝이 뒤좇았다.
麝香 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어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뜯어.
달아나거라. 저 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麝香 芳草??길
저 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石油 먹은 듯……石油 먹은 듯……가쁜 숨결이야.3)
비로소 펜을 놓자 피로가 한꺼번에 겹쳐 왔다. 그는 식은 땀을 닦으며 몸을 벽에 기대었다. 맞은 편 벽에 붙어 있는 박쥐의 바늘 박힌 날개가 흐릿하게 보이면서, 아련히 그 위로 유년시절이 겹쳐 왔다.
내 永遠은 물빛 라일락의 빛과 香의 길이로라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
해일로 바다가 넘칠 때면, 집 울타리까지 지느러미를 늘어뜨리던 바닷물, 그때마다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돌아왔다고,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던 외할머니의 들뜬 눈빛, 이런 불교의 윤회적 발상은 질마재라는 특이한 체질을 가진 땅과 이상하게 관련되어 그를 매료시켜 왔었다.
바닷물이 넘쳐서 개울을 타고 올라와서 삼대 울타리 틈으로 새어 옥수수밭 속을 지나서 마당에 흥건히 고이는 날이 우리 외할머니네 집에는 있었읍니다. 이런 날 나는 망둥이 새우 새끼를 거기서 찾노라고 이빨 속까지 너무나 기쁜 종달새 새끼 소리가 다 되어 알발로 낄낄거리며 좇아다녔읍니다만, 항시 누에가 실을 뽑듯이 나만 보면 옛날이야기만 무진장 하시던 외할머니는, 이때에는 웬일인지 한 마디도 말을 않고 벌써 많이 늙은 얼굴이 엷은 노을빛처럼 불그레해져 바다 쪽만 멍하니 넘어다보고 서 있었읍니다.
그때에는 왜 그러시는지 나는 아직 미처 몰랐읍니다만, 그분이 돌아가신 인제는 그 이유를 간신히 알긴 알 것 같습니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고기잡이 다니시던 漁夫로, 내가 생겨나기 전 어느 해 겨울의 모진 바람에 어느 바다에선지 휘말려 빠져 버리곤 영영 돌아오지 못한 채로 있는 것이라 하니, 아마 외할머니는 그 남편의 바닷물이 자기집 마당에 몰려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렇게 말도 못하고 얼굴만 붉어져 있었던 것이겠지요.4)
그리고 할머니가 들려주던 동네 도깨비집 이야기, 친근한 얼굴로 그의 앞에 금방이라도 나타날 듯했던 그 집의 도깨비 마누라……고향 질마재는 그의 아득한 전설이었다.
늘 그렇듯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의 끝자락에서 그가 이번에도 떠올린 것은 라일락이었다. 줄포공립보통학교 3학년 때였으리라. 그의 여선생에게 라일락 꽃을 꺾어 드렸던 것은…… “정주, 이 아이는 내 아입니다.”
그렇듯 끔찍이 위해 주셨던 선생님. 따스한 품이요, 우주였던 고향 질마재로부터 떨려나와 부안 줄포라는 곳으로 뿌리뽑힌 나무처럼 이사왔을 때, 외로운 소년을 따스하게 감싸주었던 그 여선생님이 훌쩍 일본으로 떠나버리게 되었을 때, 그의 비워진 가슴에 안타까움으로 피어오른 꽃, 그것은 라일락이었다.
“내 永遠은 물빛 라일락의 빛과 香의 길이로라. 가다 가단 후미진 굴헝이 있어, 소학교 때 내 女先生님의 키만큼한 굴헝이 있어, 이쁜 女先生님의 키만큼한 굴헝이 있어, 내려 가선 혼자 호젓이 앉아 이마에 솟은 땀도 들이는 물빛 라일락의 빛과 香의 길이로라 내 永遠은.”5)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1936년, 마침내 《시인부락》에 ,<花蛇>를 발표했다.
그 시절, 그는 원죄의 문신들을 온몸에 새긴 채 절망의 불꽃 같은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자신을 보곤 했던 것일까.
“아-반딧불만한 등불 하나도 없이
우름에 젖은얼굴을 온전한 어둠속에 숨기어가지고……너는.
無言의 海心에 홀로 타오르는
한낫 꽃같은 心臟으로 沈沒하라.-바다-”6)
스스로 미치거나 침몰하거나 아니면 스스로를 해체해 버리고 말 것 같은 단명의 미학!그것은 온갖 수식적인 미학을 거부한 ‘내심의 독백’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내 너를 찾어왔다…臾娜, 너참 내앞에 많이있구나 내가 혼자서 鐘路를 거러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오는구나. 새벽닭이 울때마닥 보고싶었다…내 부르는소리 귓가에 들리드냐. 臾娜, 이것이 메萬時間만이냐. 그날 꽃喪阜 山넘어서 간다음 내눈동자속에는 빈하눌만 남드니, 매만저 볼 머리카락 하나 머리카락 하나 없드니, 비만 자꾸오고.….燭불밖에 부흥이 우는 돌門을열고가면 江물은 또 메천린지, 한번가선 소식없든 그 어려운 住所에서 너무슨 무지개로 네려왔느냐. 鐘路네거리에 뿌우여니 흐터저서, 뭐라고 조잘대며 햇벼에 오는애들. 그중에도 열아홉살쯤 스무살쯤 되는애들. 그들의눈망울속에, 핏대에, 가슴속에 드러앉어 臾娜! 臾娜! 臾娜! 너 인제 모두다 내앞에 오는구나.”7)
혹은 논리성을 초극한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서녘에서 부러오는 바람 속에는
오갈피 상나무와
개가죽 방구와
나의 여자의 열두발 상무상무
노루야 암노루야 홰냥노루야
늬 발톱에 상채기가
통수??소리와
서서 우는 눈먼 사람
자는 관세음.
서녘에서 부러오는 바람속에는
한바다의 정신??병과
징역시간과8)
‘허이여케’ 드러내는 악마적인 이빨,“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시뻘건 참숯불덩이 같은 시절이었다. 몸에 피란 피는 모두가 다 철철 흘러 넘쳐 몸뚱이만 헐벗어 남고, 마치 용암이 흘러내리듯 감히 범접 못할 원죄의식!’“이때 당시 내 많은 시들의 배후에 숨어 있는 것은 ‘니체’적인 호흡이다. 여러분이 그걸 느껴주기로 한다면 ‘화사’라는 작품에서나 ‘대낮’ 같은 작품에서나 ‘정오의 언덕에서’ 등, 기타의 딴 작품들에서도 니체의 찌라투스트라적인 그 벅찬 초극의 숨소리는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아풀로’의 햇빛과 ‘디오니소스’의 춤의 찌라투스트라적인 온도 높은 상태의 영향은 또 내게 자연히 한여름을 숭상하는 마음의 버릇도 길렀던 것이다. 이즈음의 많은 시편들이 여름을 나타내고 있는 건 그 때문이었다.”
자살
그리고 그후로도 한참이나 무엇에 그리도 숨가쁘게 쫓기고 내달렸던가.
‘화사집’으로부터 10년이 지난 1951년 봄, 그는 자살을 감행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 절망의 불꽃이 재 스스로를 연소해 버릴려는 순간이었다. 치사량 5인분쯤의 독약을 먹었다. 손가락 끝마저 무겁게 느껴졌다. 눈시울 밑이 경련을 일으키고,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자신도 왜 자살을 감행할 수밖에 없는가, 스스로에게 연신 물었지만 대답 대신 우울한 절망감 속에서, 그의 손끝으로 빠져나간 시의 구절들이 배암의 문신처럼 떠오르고는 했다.……잔치는 끝났드라. 마지막 앉아서 국밥들을 마시고 빠앍안 불사르고, 재를 남기고……포장을 거드면 저무는 하늘. 이러서서 主人에게 인사를 하자. 결국은 조금??식 醉해 가지고 우리 모두 다 도라가는 사람들…10여년 전, 김기림의 청탁으로 썼던 조선일보 폐간 기념시였으리라. 그때는 일제하였고, 이제 전쟁이다. 그리고 자신은 절망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점점 몸이 풀리면서 나른해진다. 약기운이 온몸에 퍼지는 것이리라. 벽이 기울어지면서 뒤로 물러난다. 갑자기 내면의 불이 켜진 듯 환해진다. 정신들의 마지막 축제일까.
시집오던 때의 달뜬 아내의 모습, 아내의 행색을 보며 기뻐하던 아버지, 처자, 처자와 함께 살기 위해, 만주 간도성의 한 양곡회사에 단신으로 부임해 갔다가 못쓰게 생겨서 돌아오기도 했던 기억, 그 후로 서울의 한 사립국민학교의 교사가 되어서야 비로소 처자와 함께 할 수 있었던 셋방살이…그러는 동안 ‘신화적인 신인’ 같은 것보다는 ‘처자와 함께 어떻게 빌어먹고 살며 또 어떻게 그들을 타락하지 않게 돌보아 이끌고 가는가?’하는 한 식민지 조선인으로서의, 속인으로서의 살 길이 먼저 해야 할 일이 되었던 식민지 말기 시절들,……그 아픈 족적처럼 <귀촉도>가 떠오른다.
눈물 아롱 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西域 三萬里
흰 옷깃 염여 염여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巴蜀 三萬里
신이나 삼어줄??걸 스은 사연의
올올이 아로색인 육날 메투리.
온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혀서
부즐없은 이 머리털 엮어 드릴삥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 하늘
구비 구비 은하??물 목이 젖은 새,참아 아니 솟는가락 눈이 감겨서
제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9)
‘독약을 마신지 얼마나 되었을까. 머리가 어찔거린다. 두렵다. 침착하자. 불을 끄자. 동굴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이 순간 검은 정적 이외에 어떠한 것도 나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머릿속에 찬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어느 벌레가 갉아 먹는 건가? 소름이 끼쳐온다. 무서움이 자신을 흔들리게 한다.
정신이 칼날로 곤두선다. 스치는 바람에도 소름이 돋는다.’ 그럴수록 그는 무엇엔가 자꾸만 쫓겨 달아나는, 죽음 저편으로 흘러가버릴 듯한 어떤 생의 흔적을 붙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야 했다. 저편 흰 빛으로 반짝이는 것은 무엇일까? 이조백자?그 순간 그는 입에는 희미하게 미소가 흐른다. 절망감 속에서도 사물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보내려 했던, 그 시절의 모습이 기특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처 단풍 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10)
그렇다. 1949년 해방되면서는, ‘풀도 차마 못 나는 곳’이라는 의미의 窮髮이라는 자호를 땅에 묻고 그 대신 그 자리에 늘 소년이려는 마음이 되어 ‘미당’이라는 새호를 만들어보기도 했잖은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정신을 놓지 않아야 하는데, 않아야 하는데…하며 되뇌였다. 그러나 이미 누군가 자신의 끝을 향한 비수를 건너 받았던가. 머리가, 전신이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는다. 벽이 기울어지면서 뒤로 물러난다. 정신을, 정신을…
신라정신의 숲에 깃들이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이승 밖으로 밀어내지 않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느 의사가 그의 속을 씻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서서히 원상태를 회복해가면서 다시 잔인한 삶을 준비해야 했다. 세파 속에서 뿌리째 뽑혀버린 그의 삶이, 정신이 깊게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야 했던 것이다.
“우리 나라 옛 어른들 가운데 그래도 제정신 차려 살던 이들은 어떻게 살았던가? 마음 속으로 더듬거려 보던 끝에 결국 우리의 신라와 구체적으로 만나 보기로 했어요.”신라정신에의 천착이었다. 그의 새롭고도 긴 정신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때에 내가 만나 알아본 신라정신이라는 건 첫째는 삼국시대 이전-아마 단군 때나 그보다 좀 먼저부터 우리 나라에 뿌리를 내려온 그 국선의 길이었고, 둘째는 불교가 들어온 뒤에 그 영향을 받아 생긴 것들이었다.
구체적으로 국선도의 예를 들자면 <삼국유사>에 나오는 ‘수로부인’ 조목이나, ‘포산이성’ 조목이나 박혀거세 왕의 어머니 ‘사소’의 입산에 관한 부분 같은 것은 완연히 우리의 국선사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니, 이런 것들을 불교적인 설화들과는 식별해서 읽어야 할 것으로 안다.”우리 국선도를 알기 위한 두 개의 중요한 열쇠는 하나가 <삼국유사>의 고조선조였고, 다른 하나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진흥왕조에 보이는 고운 최치원이 썼다는 난랑비서(鸞郞碑序)라는 글이었다.
두 향나무 사이, 걸린 해마냥
지, 징, 지, 따, 찡.
가슴아
인젠 무슨 金銀의 소리라도 해 보려무나.
내 閣氏는 이미 물도 피도 아니라
마지막 꽃밭 蒸發하여 고인
시퍼렇디 시퍼런 한마지기 이내(嵐)!11)
여기에 내보이는 신선기풍!
그가 몰입했던 한 모습이었다.
그는 무의식 중에, 쫓기고 내달리는 꽃배암이 아닌, 한자리에 넉넉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산이 되기를 바랬던 것일까.
“가난이야 한낱 襤褸에 지내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여름 山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靑山이 그 무릎아래 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수밖엔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여드는
午後의때가 오거든
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어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럼히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풀 쑥굴헝에 뇌일지라도
우리는 늘 玉돌같이 호젓이 무쳤다고 생각할일이요
靑苔라도 자욱이 끼일일인 것이다.”12)
그 후로 신라정신 숲으로의 오랜 거님이 있었다. 그리고 맨 처음 발을 디딘지 근 20년이 지난 1968년, 고도의 미학적 상상력과 불교적 사상의 심오한 세계가 일치를 보게 된 시집《동천》을 내놓게 되는 것이다.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운 눈섭을
즈문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옴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13)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살아야 했던 젊은 날의 고뇌로부터 만월의 비전을 성취하기까지의 그의 시의 생애의 압축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 자신의 자서전인 셈인 것이다.
질마재 신화 속에 똬리를 틀다.
“최치원의 <난랑비서>에서 보면 예부터 전해져 오는 우리 나라의 풍류도-즉 국선도는 ‘불교, 유교, 도교 세 가지 가르침의 정신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는 관찰을 하고 있거니와, 이것도 내게는 적지 않은 참고가 되어서, 나도 내 나이 쉰 언저리부터는 모든 성인들의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받아들이며, 또 세계문화사 속의 큰 사상들도 아울러 참작해 살아가는, 말하자면 종합주의의 길을 택하기로 했다.”종합주의, 종합정신!
살이 닿은 가족적인 자연, 곧 고향을 이야기하고 있는 <질마재 신화>는 바로 그런 종합정신이 융화된 세계였다. 외할머니에게서 들었던 民話와 동네의 사건들을 파격의 민간신화적 산문시집으로 상제하게 된 것이다.
‘신화적 시간은 순환적이고 반복적인 데 반하여 역사적 시간은 진행적이고 일직선 적이다. 이 두 개의 시간적 차원에서 우리는 산다. 전자에는 인간 원형, 궁극적 가치 기준, 전논리적 심성이 놓이고, 후자에는 변화와 진보, 창조, 논리적 심성이 놓인다. 이 두 개의 차원의 결속이 문화와 그리고 소외되지 않는 삶의 리얼리티이다. 자아와 세계와의 일체감의 상실과 재획득이, 타락(상실)과 구원(회복)이, 기억과 상상력의 統全이 모든 문화의 기본구조이고, 여기서 시의 소외의 극복이 가능해진다. 이것이 질마재가 가진 전부이다.’
유월이라 유둣날은 살풀이 가세.
살풀이는 하여서 뭐가 풀리나?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 감으면
머리털에 햇빛은 곱게 풀리네.
머리 감고 임네 집 한 번 더 가자.
우리님이 감은 눈을 뜰지도 몰라.14)
이때 그는 이미 광활한 정신의 숲을 거느린 산이 되어 있었다. ‘화사라는 꽃뱀 하나가 혀를 날름거리는 불길이 되어 꿈틀거리다가 한 50년쯤 지난 뒤에 비로소 산 하나로 천연히 자리잡은 꼴이라고 할까.’ 그의 산등허리는 세계로 넓게 넓게 내달리는가 하면 또한 위로 솟아올랐다. 큰 산을 이루어 가는 것이었다.
《떠돌이의 詩》(1976), 《서으로 가는 달처럼》(1980) 《鶴이 울고 간 날들의 詩》 (1982), 《안 잊히는 일들》(1983), 《노래》(1984), 《팔할이 바람》(1988), 《山詩》(1991)는 바로 그런 과정의 족적이리라.
큰 산
그의 겨드랑이에는 신화가, 전설이, 민화가 숨쉬고 있었고, 수맥 속으로는 신라정신이, 세계정신이 한 데로 녹아들며 흐르고 있었다. 그의 등허리로는 자연과 신의 섭리에 순응하며 사는 나무와 꽃, 새들이, 그의 가슴팍에는 마음을 겸허하게 지키며, 갈등 사이에서 얻어내는 인간다운 삶을 소중히 하는 사람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히말라야 山사람의 運命은
아직도 옛날 그대로
하늘에서 드리우고 있는
산 동아줄에 매달려 있다.
그리고 이 동아줄의 마음 속에는
아조 밝은 눈이 있어
초롱초롱하시다.
그러나 꿈에라도
불 꺼진 잿더미 곁에는 가지 마라.
날리는 잿가루에 눈이 멀면
네 동아줄 속의 눈도 멀어 삐린다.15)
부조화했던 것들조차 서로 화해를 이루고, 새로운 조화를 이루어가며, 어울리는 커다란 거소! 그 속에는 자연스럽게 삶의 따스함이 깃들이어 있고, 또 그로 인해 뵈어지는 세상사를 살아 내는 슬기, 요량, 즉 삶의 본질을 담고 있기도 했다. 따스한 숲이었다.
나 에베레스트를 비롯해서
히말라야 全山脈의 山들을
가는 떡가루처럼 두루 빻아
四億三千百萬 年이 지날 때마다
그걸 모다 뿌려 마친 時間의 길이도
그건 역시나 可限數라
처음도 없고 끝도 없이 영원키만한
자기의 精神生命에 견줄 수는 없다고
또렷또렷 제자들을 타이르고 있던
네팔의 釋迦牟尼
그런 사내를
나는 아직도 더 본 일이 없다.16)
이 끝없이 이어가는 정신생명의 영생.
장엄한 인간생명에 대한 이해와 존중, 그리고 실현.
화사는 마침내 큰 산으로 똬리를 튼 것이다.
徐선생 근황은?
“<산시> 이후의 근년의 내게는 아직 그 철이라는 게 들지 않은 어린이들이야말로 사람들이 당연히 가져야 할 좋은 인간본성의 임자들로 생각하는 버릇이 생기면서, 내 유년시절의 추억에 몰입해서 그걸로 시작품들을 만들어 오고도 있다. 81세의 이 나이에 마음에 묻은 때들을 말끔히 씻어 어린이 천사시절에의 환원을 이루어보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작정이 있으니, 그것은 그 동안 내가 내 시에 묻힌 산문적인 안이한 타성을 떠나 시 본래의 율조와 암시력과 함축미를 다시 회복하는 길이다. 이것은 아무래도 바짝 줄여 간추린 짤막한 구성을 다시 회복하는 노력에서 시작해야겠다.”(1996년 1월호)
주 1) 詩 <自畵像>에서
주 2) 詩 <문둥이>에서
주 3) 詩 <花蛇>중에서
주 4) 詩 <海溢>에서
주 5) 詩 <내 영원은>에서
주 6) 詩 <바다>중에서
주 7) 詩 <復活>에서
주 8) 詩 <西風賦>에서
주 9) 詩 <歸蜀途>에서
주10) 詩 <푸르른 날>에서
주11) 詩 <두 향나무 사이>중에서
주12) 詩 <無等을 보며>에서
주13) 詩 <冬天>에서
주14) 詩 <流頭날>에서
주15) 詩 <히말라야 山사람의 運命>중에서
주16) 詩 <어느 맑은 날에 에베레스트山이 하신 이야기>중에서